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화

서나연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 결국 유재민 옆에 서게 되었고 이름 없는 짝사랑 상대에서 유재민의 약혼녀가 되었다. 그런데 결혼을 보름 앞둔 시점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저 북서 지역 연구소로 옮기겠습니다. 명단에 제 이름 하나만 추가해 주세요.” 서나연은 서명 완료된 신청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컴퓨터로 업무를 보던 담당자가 놀라 고개를 들며 물었다. “나연아, 너 다음 달에 유재민 씨랑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 다들 알잖아. 너 유재민 따라 연구소 들어온 거. 이제 결실을 맺는 순간인데 간다고?” 그 말에 서나연은 씁쓸함을 억누르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냥 승인만 해주세요.” 이곳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난 몇 년 동안 얼마나 애를 쓰며 유재민 곁에 서 있었는지. 승진 기회를 포기하고 그의 조교를 자처했고, 모든 근접 접촉을 거부해도 서나연은 비현실적인 끈기로 버텼다. 그렇게 10년에 걸쳐 유재민은 서나연의 존재에 익숙해졌고 그녀는 그의 사소한 생활을 정리해 주며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대신 끊어주었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이 보기에 유재민은 서나연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 같았다. 외로움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천재 연구자는 서나연의 생일만큼은 기억했고 그녀의 몸이 좋지 않은 날엔 예외적으로 연구실 휴게실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나연은 알고 있었다. 그 생일 선물은 정성도 없는 거액의 계좌이체였을 뿐, 아픈 날에 함께 있어도 유재민은 밤새 연구실 불을 켜둔 채 옆방에서 미친 듯이 기침하는 그녀를 단 한 번도 살펴보지 않았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 유재민의 프러포즈는 서나연에게 흔들린 마음 때문이 아니라 두 달 전 있었던 납치 사건 때문에 생긴 ‘빚’이었다는 사실을. 유재민이 끌려간 폐공장에 서나연은 혼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를 감싸기 위해 앞으로 몸을 던진 순간 범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옮겨갔다. 그들은 여자인 서나연에게 발길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 몽둥이로 몸을 마구 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격분한 범인들은 서나연의 머리를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내리찍었지만 그녀는 시간만 끌면 경찰이 도착한다는 집념 하나로 끝까지 버텼다. 결국 유재민은 구출됐지만 그날의 폭력으로 인해 서나연은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 다시 눈을 뜬 날, 연구실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던 유재민은 그녀의 병실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피로감이 가득 드러나 있었고 목소리는 잠긴 탓인지 평소보다 더 낮았다.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결혼 날짜 정해야지.” 서나연은 오랜 시간 동안 유재민의 옆을 맴돌던 사람이기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건 사랑 때문에 하는 결혼이 아니라 미안함 때문에 차린 ‘예의’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그 미안함에 기대었다. 그것이 비겁한 거래임을 알면서도 그저 옆에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채유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서나연은 아마 평생 스스로를 속이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서나연은 곧 사무실을 나와 건물 하나를 지나다가 대형 스크린에서 국제 정상회의 생중계가 흘러나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밑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봐봐! 유재민 씨랑 채유진 선배야!” “둘이 진짜 잘 어울린다. 이번에 유진 선배 논문도 유재민 씨가 직접 봐줬대.” “유재민 씨 마음도 열렸나 봐. 하긴... 유진 선배면 얼음도 녹일 수 있지.” 사람들이 떠드는 목소리는 서나연의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연구소 모든 사람들은 유재민과 채유진의 궁합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유재민의 진짜 약혼자가 서나연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서나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화면 속에서 채유진이 유재민의 귓가에 말을 건넸고 유재민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고 불편함이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서나연이 하던 업무 보고조차 세 걸음 뒤로 물러서 거리를 둬야 했던 사람이 누군가의 숨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똑똑히 기억했다. 처음으로 유재민의 입에서 채유진이라는 이름이 나온 날을. 어지럽게 쌓인 데이터 앞에서 그는 씩 웃으며 말했었다. “유진이가 또 샘플 순서 바꿔놨더라.” 큰 실수이지만 채유진을 나무라지도 않았고 허용해 줬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모든 걸 품어준다는 태도로. 채유진은 지도교수의 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같은 연구팀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녀는 늘 밝고 활발한 사람이라 거리낌이 없었다. 어떤 땐 유재민 손에서 펜을 가져다가 노트에 뭔가를 적었고 자기가 마시던 음료를 그에게 건네며 맛보라 했다. 게다가 유재민이 집중할 때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애교를 부렸다. 그리고 유재민은 그런 가까움을 견디지 못해 불편해하다가 점점 익숙해졌다. 채유진이 어지럽힌 책상을 정리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건넨 음료를 아무 말 없이 받았으며 심지어 농담을 하면 가볍게 웃어주기까지 했다. 결정적으로 연구실 한쪽에서 채유진이 살짝 발을 들고 유재민의 볼에 입을 맞추던 순간, 그는 잠시 멈칫했을 뿐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았다. 서나연이 가까이 다가가거나 스킨십을 하려고 하면 기겁하며 물러서고, 어떻게든 피하던 사람이 채유진의 입맞춤은 받아들였다. 그때 서나연은 알았다. 유재민이 진짜로 누군가를 좋아하면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사랑에 서툰 소년처럼 자신이 세운 모든 원칙이 무너진다는 것을. 서나연은 두 사람이 함께 쓰기로 했던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유재민은 한 번도 문턱을 넘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옷장을 열어 자신이 채워 넣은 옷들을 차례대로 꺼내기 시작했다. 함께 살 거라고 생각하며 준비한 작고 예쁜 생활용품들이 모조리 무언의 조롱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박스를 가져와 자기 흔적들을 하나씩 담았고 이사센터 예약을 신청했다. 모든 정리를 마친 순간,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 그건 북서 지역 연구소 인사이동이 공식 승인됐다는 알림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유재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항공편 CA1837, 내일 밤 8시에 도착이니까 데리러 나와.] 서나연은 그 메시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 [시간 없어.]
Previous Chapter
1/24Next Chapter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