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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서나연은 손이 빨랐다. 하루 만에 집 안에서 자신의 흔적이란 흔적은 모두 사라졌고 중개인이 손님을 데리고 집을 보러 왔을 때, 여기서 누군가 살아왔다는 느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그녀라는 사람도 몇 년을 들여 곁에 있어 주었건만 유재민의 삶 속에 아무 자취도 남기지 못한 것처럼. “서나연 씨, 진짜 이 집 내놓으실 건가요? 이 위치에 이 정도 인테리어면 가격이 너무 싼데요?” “네. 그냥 빨리 처분하고 싶어요.” 계약서에 서명하던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 집은 한때 설렘으로 샀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떠나려고 마음먹은 이상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연구소는 업무 인계까지 마무리해야 이동 허가가 난다고 했고 서나연은 본부에 2주가량 더 머물러야 했다. 유재민과 채유진이 귀국하는 날, 서울엔 제법 굵은 비가 내렸고 서나연은 실험실에서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휴대폰 화면이 깜박이며 알림 하나가 떴다. [도착했어.] 예전 같았으면 새벽이든, 비가 쏟아지든, 문자를 보는 순간 바로 차를 몰고 갔을 것이다. 39도가 넘는 열이 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기어이 차를 몰아 공항으로 갔다가 내려서 기다리는 동안 기절해 버렸고 결국 유재민이 직접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그 일을 뒤늦게 안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몸이 안 좋으면 오지 않아도 돼.” 그 말에 서나연은 오랫동안 우울해했다. 자신이 두 사람 사이에 쌓인 감정을 망쳤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지금, 서나연은 화면을 꺼두고 다시 데이터 정리에 몰두했다. 연구소는 귀국한 유재민과 채유진을 위해 작은 환영회를 준비했다. 원래라면 가지 않았겠지만 부원장이 직접 참석을 언급했기에 빠져나갈 명분이 없었다. 서나연이 도착했을 땐 이미 환영회가 절반쯤 진행된 뒤였기에 그녀는 가장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자리의 중심에는 당연히 유재민과 채유진이 있었다. 채유진은 회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흥미롭게 풀어냈고 사람들은 재밌다는 듯 깔깔 웃었다. 평소라면 불편해했을 유재민도 그저 가만히 듣고 있을 뿐 거부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기쁨에 취한 채유진은 그의 팔을 끌어안고 흔들며 웃기도 했지만 유재민은 살짝 미간만 찡그릴 뿐 피하지 않았다. “아, 맞다! 어제 진짜 난리였어요.” 채유진은 화제를 돌리더니 시선을 자연스럽게 서나연에게 돌렸다. “비행기 지연돼서 겨우 도착했더니 비까지 오는 거 있죠? 차를 하나도 못 잡아서 저랑 재민 선배 둘 다 한참 서 있었어요. 짐도 다 젖어버리고. 나연 언니, 예전엔 항상 언니가 마중 나왔잖아요. 이번엔 왜 안 온 거예요?” 그 순간, 테이블 위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서나연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공항 픽업은 제 업무가 아니거든요.” 채유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때, 유재민 또한 고개를 돌려 서나연을 쳐다봤다.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눈동자에는 의아하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상하겠지. 그동안 내 보살핌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무언가 필요하면 이미 준비되어 있고 어떤 공백도 생기지 않는 그런 삶. 유재민의 삶에 서나연은 마치 공기 같아서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고 없어져야 티가 나는 존재였다. 그렇게 환영회는 묘하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는 순간, 복도 끝에서 유재민이 그녀를 막아섰다. “너 오늘 왜 이래?” 늘 그렇듯 담담한 목소리에 서나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다지 밝지 않은 조명 아래에서도 뚜렷한 이목구비, 예전엔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다고 믿었던 사람. “뭐가?” “유진이는 그냥 물어본 거잖아.” 그는 상황을 설명하려는 듯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이번 회의에서 유진이 전문 분야가 크게 도움 됐어. 너는 조교 역할이니까 이런 건 원래...” 서나연은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질투로 문제를 만든다고 생각하고 그걸 풀어주려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유재민.”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과 성을 함께 불렀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단 한 번의 호명으로 유재민은 굳어버렸다. “난 지금 질투가 나서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니야. 그리고 네가 채유진 씨랑 같이 회의에 참석해서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서나연은 유재민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쿡쿡 아려왔다. 하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듯,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속에서 수십 번 연습했던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우리... 약혼 취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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