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4화

염미정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조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지금 일어날게.” 말을 마친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움직이는 순간 상처가 아팠지만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응하자 구시헌의 마음속에 묘한 불안감이 스쳤다. 처음에는 분명히 그녀가 거부하거나 전처럼 따지고 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염미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구시헌이 뭔가 더 말하려던 그때 염미주가 새하얀 팔로 그의 팔짱을 끼며 나직하게 애교를 부렸다. “시헌 오빠, 저 배고파요. 아까 오빠가 너무 오래 괴롭혀서...”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구시헌이 대답했다. “그래. 도우미에게 맛있는 거 준비하라고 할게.” 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염미주의 얼굴에는 즉시 조롱이 번져갔다. “봤지? 이제 시헌 오빠는 나만 사랑해. 발 빼고 빨리 나가. 여기 계속 있으면 꼴사나워.” 염미정은 가볍게 냉소를 터뜨렸다. “걱정하지 마, 염미주. 너희 둘이 침대에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이미 구시헌과 끝낼 생각이었어. 구씨 가문 안주인 자리가 욕심난다면 가져가.” 이를 꽉 깨물며 염미주가 말했다. “그 자리는 원래 내 거야. 네가 줄 필요도 없거든!” 그녀는 자신이 20년 동안 아껴온 동생을 바라보며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고 무서웠다. “염미주, 어렸을 때부터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양보해 줬어. 네가 구시헌을 좋아했다면 나한테 말하면 됐잖아. 왜 굳이 그렇게 나 몰래 유혹한 거야?” 순간 염미주의 얼굴이 굳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는 네가 좋아하는 남자까지 나한테 양보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헌신적이라고 생각하지? 염미정, 말해줄게. 내가 제일 역겨워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네 그 위선적인 모습이야. 내가 갖고 싶은 건 내가 직접 빼앗아 올 수 있어. 네 양보 따윈 필요 없다고!” 염미정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해준 것들이 네 눈에는 전부 위선이었구나.” “그게 아니면 뭔데?” 염미주는 미친 듯이 외쳤다. “어릴 때부터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늘 너만 봤어. 나는? 나는 왜 평생 2등이어야 해?” 그 말들을 들은 순간, 염미정은 마음이 완전히 식으며 더 이상 말도 섞기 싫었다. 그녀가 돌아서며 방을 나가려던 찰나 염미주가 광기 어린 눈빛으로 달려들었다. “너는 구시헌을 못 떠나잖아? 그럼 내가 도와줄게!” 짝! 염미주는 자기 뺨을 양쪽으로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염미정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염미주, 미쳤어?” 바로 그 순간, 뒤에서 구시헌의 분노에 찬 고함이 터졌다. “염미정, 너 미주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가 달려오더니 그녀를 그대로 세게 밀쳐버렸다. 하필 뒤에는 값비싼 꽃병이 있었다. 꽃병이 산산이 깨지며 날카로운 조각들이 그녀의 등으로 파고들었고 피가 순식간에 흘러내렸다. 끔찍한 고통에 온몸이 떨리고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구시헌은 염미정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염미주를 끌어안으며 그녀에게 염미정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다정하고도 따뜻한 눈빛을 주었다. “미주야, 괜찮아? 왜 반격도 안 해?” 염미주는 조금 전의 오만함을 싹 지우며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저는 괜찮아요. 오빠, 언니를 탓하지 마요. 언니도 제가 오빠를 뺏을까 봐 참지 못하고 그랬을 거예요. 언니, 내가 잘못했어. 오빠는 언니 거야, 내가 떠날게...” “염미정!” 구시헌이 고개를 확 돌렸다. 눈빛은 어두웠고, 차갑고 잔혹했다. “미주는 내가 돕는 거고 내가 데려온 거야. 나한테 따지면 되지 누가 너더러 미주를 때리랬어?” 염미정의 숨이 턱 막히며 내장이 뒤틀릴 듯 아팠다. 그녀는 간신히 대답했다. “미주가 스스로 때린 거야!” 서럽게 흐느끼며 염미주가 입을 열었다. “언니, 화 풀어. 오빠를 언니한테 돌려줄게...” 그 위선적인 얼굴과 연기하는 목소리에 염미정은 분노로 몸이 떨려 참지 못하고 앞으로 걸어가 정확하고 크게 염미주의 뺨을 후려쳤다. “구시헌, 잘 봐. 이게 내가 때린 거야. 아까는 미주의 털끝 하나 건드린 적 없어. 못 믿겠다면 저기 복도 CCTV 확인해 봐.” 순간 염미주는 복도에 카메라가 있다는 걸 떠올린 듯 갑자기 눈을 뒤집으며 기절하는 척했다. 구시헌은 더 따질 겨를도 없이 염미주를 안아 들고 서둘러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염미정의 어깨를 일부러 세게 부딪쳐 그녀를 또다시 바닥에 넘어뜨렸다. 이번에는 꽃병 조각이 무릎을 깊게 찔렀고 숨이 멎을 만큼 아팠다. 그는 걸음을 멈추는 듯했지만 결국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런데 그의 품 안에서 ‘기절한’ 염미주가 염미정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구시헌의 등 뒤를 바라본 염미정은 체념하듯 웃으며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예전의 구시헌은 그녀가 미간만 찌푸려도 걱정했다. 생리통이 심하면 서울의 명의를 모조리 불러올 기세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피를 흘리고 있어도 그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랑과 무정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분명하다니.’ 염미정의 심장은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고통으로 가득 찼다. 그날 밤, 그녀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새 짐을 정리하며 자신의 물건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구시헌은 염미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말했다. “염미정, 집 안 물건이 왜 이렇게 많이 없어졌어?”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