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신월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세희가 제멋대로고, 성깔 있고, 남자를 옷 갈아입듯 바꿔 치운다는 소문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후원’이라는 핑계로, 가난한 소년 이도원을 사랑하게 되었다.
가문에서 정해준 혼인을 거부하면서까지 말이다.
그 대가로 한세희는 무려 오십 대의 형장을 맞았다.
폭우가 퍼붓는 날, 한세희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등 뒤로 흘러내리는 피가 옷과 마음을 적셨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세희의 아버지, 한병철이 그녀의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심지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다 끝났어요? 내 행복을 위해서라고요? 명예를 위해 아내를 팔아버린 놈이 이제 딸까지 팔아먹으려고 하네? 꿈도 꾸지 마요. 난 당신한테 휘둘릴 생각 없으니까.”
말을 끝낸 그녀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뒤에서 값비싼 장식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지만 한세희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차로 돌아온 순간, 휴대폰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하아...”
친구, 박연지가 보내온 메시지였다.
[세희야, 큰일 났어!!! 방금 양아치들이 이도원한테 시비 걸고 있던데, 얼른 가봐!]
“!”
한세희는 이도원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에 순간 희미하던 시야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생각도 없이 액셀을 밟았다.
‘이도원은 얌전해서 싸울 줄도 모르는데... 가난하게 살아서 영양도 부실하고... 그런 그가 양아치들한테 당해낼 리가 없어.‘
한세희는 이도원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다.
그녀는 박연지가 보내준 위치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렸다. 순간 등의 상처가 찢어지며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한세희는 이도원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길가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 골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안쪽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찾으시던 분께서 내일 귀국하신답니다.”
“응, 알아.”
이도원의 목소리였다.
한세희는 순간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 멈춰 섰다.
‘도련님? 누구를 부르는 거지?’
어둑한 골목.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우산을 들고 서 있었고, 그 옆에는 한세희가 평생 헷갈릴 리 없는 익숙한 실루엣...
이도원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발치에는 몇 명의 남자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는데 방금 박지연이 말한 양아치들인 듯했다.
이도원은 그중 한 명의 손등을 밟고 짓이기듯 힘을 주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모습은 한세희가 알던 이도원이 아니었다.
“저... 한세희 씨 쪽은요?”
“심심풀이로 어울려 준 것뿐이니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서 버리면 돼.”
“...”
그 말은 비수가 되어 한세희의 심장을 후벼팠다.
‘... 뭐?’
휘청거리며 골목 밖으로 걸어 나온 한세희는 멀리에서 박연지가 소리치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귓가가 시끄럽게 울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했다. 그리고 순간, 세상이 꺼져버렸다.
한세희가 눈을 뜨니 어느덧 병실이었다.
깨어난 그녀를 발견한 박연지가 옆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너 안 데리고 왔으면 어쩔 뻔했어!!! 남자는 그냥 대충 만나보다가 헤어지면 되지 답지 않게 왜 그렇게 진지했던 거야! 똑똑한 애가 대체 왜 그러냐고! 후... 됐어. 말해 뭐 해, 네 꼴을 좀 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리고 이도원 그 자식은... 네가 쓰러졌는데 문안은커녕 연락도 없고. 어이가 없어서.”
평소의 한세희였다면 이도원을 변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잃기 전 들었던 말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꿈이었나? 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착각한 건 아닐까? ...환각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 후원받아 겨우 학교에 다니던 이도원이 도련님이라니.’
“한세희? 야! 나 말하고 있는데!”
박연지가 입을 삐쭉 내밀며 손을 흔들어대자 한세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미안, 방금 뭐라고 했어?”
“네 그 싼 티 나는 여동생 오늘 귀국한다잖아. 네 아빠가 귀국파티를 열 예정이라던데. 너 어떡할 거야?”
“...”
한세희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박연지가 깜짝 놀라며 장황히 말을 늘어놓았다.
“야, 야! 왜 그래... 사실... 네 여동생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더라. 그냥...”
“입 닥쳐.”
“!”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박연지가 일순 말을 멈췄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이도원.
그 세글자에 잿빛이던 한세희의 얼굴에 화사한 빛이 돌았다.
“도원아?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어? 난 정말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그녀는 방금의 모든 게 꿈이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지만 이도원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한세희, 오늘 한씨 가문에서 파티한다며. 나 너랑 같이 가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