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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한세희는 요즘 들어 자기한테 흉한 기운이 끼어버린 건 아닐까 싶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병원이었으니까. 깨어 있는 순간과 기절하듯 잠드는 순간이 뒤엉켜 있어 시간의 경계마저 흐릿해져 버렸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자리에 누워 있는데 옆에서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 도련님, 임태호 씨가 언제 돌아오시냐 묻습니다.” “금방 간다고 전해.” ‘... 백 도련님? 그리고 임태호? 백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면... 하!’ 그제야 모든 퍼즐이 하나로 맞아떨어졌다. 한세희가 전적으로 믿어온 ‘가난하고 선량한 청년’ 은, 사실 백성 그룹의 장손, 사람들이 태자라 부르던 인물이었다. 반면 한세희는 매달 이도원, 아니, 백도원에게 몇천만 카드를 보내주며 생활 방식까지 그에게 맞춘, 어리석은 여자였다. 이도원은 한 번도 그 돈을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준 돈은 눈에 차지도 않았겠지.’ 우스운 건지, 허탈한 건지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흘렀다. 웃음이 터지고 나니 오히려 더 큰 웃음이 쏟아졌다. 비명도 한숨도 아닌, 무너진 감정 끝에서 나오는 그런 웃음. 눈을 뜨자 병실에는 이도원만 남아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어때.” 한세희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빛을 받은 그의 윤곽이 매끈하게 떨어졌다. 예쁘게 생긴 얼굴이,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더 멀어 보였다. “왜 그렇게 봐.”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잘생긴 남자는 거짓말을 더 잘한대.”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이도원. 너도... 나한테 거짓말했어?” 그의 입술이 아주 잠깐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 고백하려는 사람처럼.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의사 말로는 한동안 안정이 필요하대. 그럼 난 더 방해 안 할게.” 그는 도망치듯 병실을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그래도 양심은, 아주 조금은 있긴 하네.’ 한세희는 이도원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는 입원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병실을 찾아온 건 오로지 박연지가 보낸 메시지들뿐. 그리고 메시지와 함께 날아온, 팬카페 스크린샷. [세희야, 이 사진에 찍힌 사람... 이도원 아니야?]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함께한 세월이 있었으니까. “하하...” 주방 조명 아래, 허리를 굽히고 최지영에게 음식을 해주는 남자, 그건 분명 이도원이었다. 분노해야 옳았다. 그런데 몸의 통증 때문인지, 마음의 피로 때문인지. 한세희는 더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겨웠다, 모든 것이. 퇴원 날, 드물게도 이도원이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새하얀 롱드레스를 입은 최지영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묘하게 어울렸고, 병원 복도 위의 차가운 조명이 그들을 마치 한 장의 그림처럼 비추었다. “언니! 정말 다행이야, 괜찮아서...” 최지영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순하고 부드러웠다.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도원 오빠가 날 구할 줄은 몰랐거든...” ‘도원 오빠?’ 그 친근한 호칭이 한세희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녀는 웃었다, 미친 듯이 웃었다. 슬픔도, 비웃음도 아닌, 비로소 모든 걸 이해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한세희는 미소를 유지한 채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도원의 놀란 시선 속에서 그대로 최지영의 뺨을 내리쳤다. 짝! 이도원은 일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옆으로 고개가 꺾인 최지영을 바라보며, 마치 사고의 한 장면을 맞닥뜨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한세희!!! 너 미쳤어?!” 그는 반사적으로 최지영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늘 그랬듯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화가 잔뜩 실린 목소리와 한세희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표정. “난 괜찮아, 도원 오빠... 언니한테 뭐라고 하지 마.” 최지영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떨리는 목소리와 깨질 듯한 표정이 가증스럽기만 했다. 한세희는 차갑게 웃었다. “야, 최지영. 언제까지 그 개같은 가면 쓰고 있을 거야? 하긴... 넌 어릴 때부터 그 얼굴로 동정받고 살았지. 역시 불륜녀 딸은 티가 나네.” 최지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언니... 사람은 태어나는 걸 선택할 수 없어. 나는 그냥... 언니랑 잘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툭 떨어졌다. 이도원의 시선은 그런 최지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병원 가자.” 그 말과 함께, 둘은 한세희를 뒤로한 채 돌아섰다. 말 한마디, 눈길조차 남기지 않고.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최지영의 승리감이 가득 담긴 눈빛은 다시금 한세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부터 써먹던 표정 그대로였다. ‘그래, 넌 늘 그랬지. 문제는 내가 그런 꼴을 못 견딘다는 거였고.’ 한세희는 짐을 챙겨 혼자 병원을 나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복도 끝으로 길게 이어진 소독약 냄새만이 그녀의 곁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택시를 잡기도 전에, 검은 마스크의 남자들이 그림자처럼 한세희를 덮쳤다.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봉고차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으읍!!!” 비명이 터지기도 전, 거친 손이 한세희의 입 위에 테이프를 붙였다. 상황을 이해할 틈조차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고. 짝. 불꽃처럼 뜨거운 충격이 뺨을 타고 퍼졌다. 귀가 울릴 만큼의 소리와 이어지는 무차별적인 폭력... 한세희는 이를 악문 채 그 모든 폭력을 그대로 견뎌냈다. 둘, 셋, 열... 숫자를 세다가 감각이 흐려졌고 마침내 백 번째가 지나갔을 때, 그녀의 얼굴은 사람의 형체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어 있었다. “끝냈습니다,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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