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주강혁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눈이 휘둥그레져 거의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너 그 참가 자격은 어디서 났어!”
그렇게 쉽게 신청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신청 자격을 얻는 것만 해도 수차례 심사를 거쳐야 했고 그걸 다 통과해야 비로소 신청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신청하기 전에 예선과 본선 결선을 한 번씩 다 치러야만 자격을 얻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겨우 살아남은 서른 명만이 신청 완료 처리가 되었고 그 이후 다시 예선과 결선을 치러 최종 상위 세 명 안에 들어가야만 국악단 입단 자격이 주어지는 구조였다. 한마디로 피 튀기는 경쟁이었다.
주강혁이 기억하기로 그 신청 날 밤은 윤라희가 이혼 문제로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그날 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무너질 듯 낮고 지친 목소리에 전화기 너머로도 안쓰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회 신청이라니,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친구가 해줬어.”
윤라희는 별생각 없는 듯 툭 내뱉었다.
“너 언제 예선 나갔어?”
“예선은 안 나갔고 그냥 바로 접수된 거야.”
주강혁은 헛웃음을 삼키며 빠져나간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되물었다.
“그 친구 누구야?”
국가급 국악 대회에 그렇게까지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설마 차도겸? 이미 이혼까지 했는데 아니겠지...’
윤라희는 잠시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아는 사람이야. 오빠는 몰라.”
그녀가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주강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힘내. 결선까지 꼭 올라가자.”
“...”
윤라희는 속으로 어이없어졌다.
‘보통은 우승하라고 하지 않나? 결선 진출이 목표라니...’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또 틀린 건 아니었다.
이건 철저하게 국악 전공자들의 무대였고 숨은 실력자들이 워낙 많았다.
연예계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아마추어 수준이었고 음 몇 개만 제대로 튕겨도 자신을 거문고 천재라 부르며 자화자찬하는 판이었다.
조서영이 거문고 8급 자격증을 가진 것도 연예계 안에서는 손꼽히는 수준이었고 그래서 기획사에서도 막대한 돈을 들여 그녀의 재능 있는 배우 이미지를 만든 것이었다.
그날, 주강혁을 보낸 윤라희는 곧바로 누워 깊은 잠에 빠졌고 다음 날 드라마 [침묵의 서약] 촬영장에 대역 배우로 나갈 준비를 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마의 공식 첫 촬영을 알리는 행사가 열렸다.
윤라희는 참석할 자격이 없었기에 그저 군중들 틈에 섞여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의 서약]의 남주인공은 요즘 떠오르는 대세 배우 정수혁이었다.
주강혁이 새로 맡은 신인으로 올해 레온 엔터에서 전략적으로 밀고 있는 간판스타이기도 했다.
윤라희 기준으로는 후배였지만 나이로는 오히려 정수혁이 위였다.
윤라희가 무심히 정수혁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정수혁도 그녀 쪽을 흘끗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를 못 본 것처럼.
윤라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지금 자신의 위치로는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건 같은 소속사에 같은 매니저를 두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조서영은 정수혁 옆에 서 있었고 이미 스타일링까지 마쳤지만 아직 의상은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 첫 촬영 분량은 여주인공 ‘수정’의 첫 등장 장면이었다. 수십 미터 높이에서 와이어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필요했는데 조서영은 위험하다며 대역을 요청했다.
행사가 끝나자 감독은 촬영 세팅을 위해 자리를 떴고 조서영은 옷을 갈아입으러 윤라희는 분장을 받으러 각각 이동했다.
곧 의상을 갈아입은 조서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끌릴 듯한 긴 흰색 드레스 위에 옅은 핑크빛 시스루 천이 겹쳐져 있었고 몽환적인 느낌에다가 소녀다운 순수함까지 더해진 외형에 현장은 단숨에 감탄의 도가니에 빠졌다.
“와, 서영 씨 진짜 예쁘다!”
“역시 사극 미모 여신 중 한 명이야! 진짜 선녀야 선녀!”
“내가 봤을 때 수정 그 자체야! 이 드라마 시청률 걱정 없겠다. 진짜!”
다들 입을 모아 극찬했다.
남자 주인공 정수혁도 옆에서 조서영을 흘끗 보더니 엄지를 세워 보였다.
감독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수정 캐릭터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외모였고 비록 투자사 쪽에서 밀어 넣은 배우였지만 이 정도 외모면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칭찬이 쏟아지자 조서영은 수줍은 듯 볼을 붉혔다. 사실 자신도 이 얼굴에 대해선 꽤 자부심이 있었다.
속으로는 흡족하면서도 겉으로는 겸손한 척 미소 지으며 말했다.
“스타일리스트 팀 덕분이에요. 전 한 거 없어요.”
그중 한 여배우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서영 씨 너무 겸손하시다. 스타일도 좋지만 얼굴이 제일 예쁜 건 서영 씨잖아요. 나는 아직 서영 씨보다 더 예쁜 사극 비주얼 본 적이...”
여배우는 갑자기 말문이 턱 막힌 듯 얼어붙었고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어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쉬기까지 했다.
“왜 그래요?”
조서영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다. 말을 하며 뒤를 돌아본 순간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방금 붙인 네일을 부러뜨릴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라희가 스타일링을 마친 채 등장하고 있었다.
직접 보기 전엔 그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없었고 막상 보고 나면 그 어떤 수식어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윤라희가 햇살 아래 걸어 나오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담은 형용사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절세미인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맑고 투명한 피부는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만큼 빛났고 흐르듯 이어지는 몸선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정말 사람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나 싶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윤라희의 이목구비는 살짝 앳된 인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성숙했고 그 변화는 치명적일 만큼 매혹적이었다.
부드럽게 그어진 눈썹, 정교한 콧대, 도톰한 입술, 가녀린 목선에 날렵한 어깨선, 매끄러운 팔과 손끝, 바람에 흔들릴 듯 가는 허리까지.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화장기 하나 없이, 대충 손본 차림이었는데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주위의 온갖 화려함마저도 뒤로 밀어낼 만큼 압도적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서영을 보며 감탄하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약 조서영을 보고 ‘예쁘다’고 했다면 윤라희를 본 순간 그건 단지 감탄의 준비 운동에 불과했다.
‘신선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면 저런 모습일까.’
괜히 비교되는 바람에 더 초라해 보였고 조서영은 그 순간 누군가에게 뺨을 세차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 윤라희를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세 시간 넘게 공들여 메이크업하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고 착각한 순간 누군가가 민낯으로 등장해 모든 시선을 빼앗아 가 버리는 것보다 더 참담한 일이 있을까.
조금 전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칭찬들이 전부 조롱처럼 느껴졌다.
조서영의 눈동자엔 질투와 증오가 서려 있었고 무엇보다 감독이 윤라희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묘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감독은 말없이 몇 초간 그녀를 바라보다가 못내 아쉬운 듯 긴 한숨과 함께 시선을 거두었다.
‘이게 진짜 수정인데... 아깝다. 너무 아까워...’
지금 맡긴 조서영과 비교하면 윤라희는 모든 면에서 아까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조서영은 이를 악물고 분노를 삼켰다.
‘흥, 윤라희가 아무리 예쁘면 뭐. 어차피 내 대역인데.’
이 배역은 자신이 몇몇 투자자를 직접 만나서야 겨우 따낸 것이고 그만큼 회사에서도 자금이 들어갔기에 함부로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조서영은 평소에도 ‘노력파 콘셉트’를 내세웠지만 실제론 한 번도 고생스러운 장면을 직접 소화한 적이 없었다.
와이어 장면 같은 위험한 촬영은 전부 대역에게 넘겼고 워낙 뒷배가 든든했기에 현장 스태프들도 뭐라 하지 못했다.
윤라희가 와이어를 타고 수십 미터 높이로 올라갔을 때, 한쪽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조서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조서영은 음료수를 내려놓고 대본을 들고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저기 수정 첫 등장 장면 말인데요. 제가 생각해 봤는데, 출연 방식 조금만 바꾸면 더 임팩트 있지 않을까요?”
막 촬영 시작을 외치려던 감독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여전히 허공에 매달려 있는 윤라희는 순식간에 뒷전으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