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오늘은 낮 기온이 삼십도 훌쩍 넘는 무더운 날이었다. 오전 열한 시가 조금 지난 시각, 윤라희는 십몇 미터 높이의 와이어에 매달려 있었고 그늘 하나 없는 햇빛 아래서 쨍쨍한 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선크림조차 바르지 못한 상태였고 정말 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현장 스태프 중 몇몇이 눈치를 보며 말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감독이 조서영과 한창 대화 중이었기에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조서영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닌지 싶은 의심도 들었고 요즘 분위기를 생각하면 누구 하나 선뜻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새 삼십 분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조서영이 무언가 생각난 듯 소리를 질렀다.
“어머, 라희 왜 아직도 와이어에 매달려 있어요? 빨리 내려줘요!”
그제야 감독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조금 전까지 조서영의 장면 제안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윤라희를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거야! 사람을 그렇게 오래 매달아 놓으면 어떡해! 빨리 내려!”
감독이 고함을 치자 다들 당황한 얼굴로 부랴부랴 장비를 조작해 윤라희를 내려보냈다.
지상에 발을 딛는 순간 윤라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볼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입술은 갈라져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흔들렸으며 온몸이 심하게 탈수된 상태였다. 정말 열사병이 올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괜찮은지 묻자 윤라희는 고개만 가볍게 저었다. 입을 열 힘조차 없었다.
조서영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고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라희야, 정말 미안해. 위에 있는 거 깜빡했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었다. 조서영은 애초에 작정하고 윤라희를 괴롭히려던 것이었다.
‘예쁘다며? 타고난 얼굴이라며? 한여름 땡볕에 반 시간쯤 매달려 있으면, 살 한 겹쯤은 벗겨졌겠지.’
윤라희는 정신이 아득한 와중에도 조서영의 입꼬리에 살짝 걸린 냉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어지러운 머리를 숙이고 마른침을 넘겼다. 지금은 일단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감독은 누군가에게 생수를 가져오게 한 뒤, 윤라희에게 잠깐 쉬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라희는 물을 조금 마시고는 조용히 일어나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시 찍을 수 있어요.”
감독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이런 배우는 정말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고 이번엔 윤라희가 와이어에 매달린 채 흰 드레스에 분홍 시스루를 입고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장면이었다.
십 미터 고공에서 내려오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에 현장은 일순간 숨을 죽였다.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바로 이어서 얼굴 클로즈업 장면 촬영을 위해 조서영이 와이어에 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찍어도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감독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불만을 터뜨렸다.
윤라희의 장면이 워낙 완벽했던 탓인지 조서영의 어색한 표정과 작위적인 연기가 더더욱 티가 났다. 화장을 완벽하게 했건만 조금 전 윤라희의 민낯보다도 별로였다.
얼굴 클로즈업 장면은 NG가 열 번을 넘게 났고 조서영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조서영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독님, 아직도 안 끝났어요?”
감독은 그 말을 듣고는 인내심이 폭발한 듯 버럭 외쳤다.
“라희 씨 연기력의 10분의 1만 있었어도 벌써 끝났어!”
그 한마디에 조서영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그대로 촬영장을 나가버렸다.
“안 찍을래요. 휴식할게요.”
촬영장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조금 전, 와이어에 매달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묵묵히 있던 윤라희와 곧장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조서영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에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떠돌던 윤라희는 갑질하고 조서영은 성실하다던 그 말이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촬영은 결국 중단되었고 점심시간이 되어 모두 식사하러 흩어졌다.
윤라희는 한참을 볕에 쬔 탓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때 잘나가던 시절, 윤라희에겐 전용 밴이 있었다. 촬영이 끝나면 곧장 돌아가 쉴 수 있었고 식사도 매니저가 배달 음식을 시켜 차 안에서 편하게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줄을 서서 도시락을 받아야 했다. 큼직한 밥통이 줄지어 있었고 무명의 배우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줄을 섰다. 스태프들이 국자로 나눠주는 모습은 꼭 고등학교 급식 시간 같았다.
윤라희는 처음으로 촬영장에서 이런 밥을 받아보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주위에서는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묵묵히 줄을 섰다. 이미 더한 것도 겪어봤는데 이 정도 수모쯤이야 참지 못할 것도 없었다.
도시락을 받아 든 윤라희는 한쪽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혼자 밥을 먹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창백한 얼굴, 그늘 속에 앉은 모습은 누가 봐도 처량했다.
한편, 조서영은 자신의 밴에 돌아오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윤라희가 뭔데! 쓰레기 같은 게 감히 나랑 비교가 돼? 뭐? 내 연기가 걔보다 못하다고? 하! 감독이랑 뭔가 있는 거 아냐? 어휴, 진짜 재수 없어.”
조서영의 로드 매니저가 눈치껏 도시락을 들고 돌아와 조심스레 말했다.
“언니, 진정하고 일단 밥부터 드세요. 몸 상하겠어요.”
젓가락을 집어 들어 반찬 하나를 입에 넣은 조서영은 곧장 도시락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게 밥이야? 이딴 걸 먹으라고 내놨어? 가서 전복밥 사와. 반찬 다섯 가지에 국 포함해서.”
유명한 배우가 고작 이런 도시락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모욕 같았다. 괜히 감독이 자신을 일부러 구박하는 거라는 피해의식마저 올라왔다.
매니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게 사실상 촬영장에서 제일 좋은 식사였는데도 조서영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문득 조서영이 그녀를 불렀다.
“잠깐.”
매니저가 멈춰 서자, 조서영은 미소 아닌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도시락 윤라희한테 갖다줘. 내가 준 거라고 전해.”
‘윤라희 따위는 내가 남긴 밥 받아먹어도 감지덕지해야지.’
로드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락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윤라희를 찾아가 말했다.
“저... 윤라희 씨. 이거 서영 언니가 챙겨준 거예요.”
순간 그 말에 주변의 엑스트라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돌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와, 서영 언니 진짜 착하다. 자기 도시락을 남한테 나눠주다니.”
“옛날부터 정 많기로 유명했잖아. 진짜 사람 안 변하네.”
“윤라희는 운이 좋은 거지 뭐. 그런 사람 만나서 아직도 도움받는 거 보면...”
조서영의 매니저는 처음엔 조금 민망해했지만 주위의 반응을 들으면서 점점 당당해졌다. 지금 윤라희는 사실상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고 조서영 같은 주연 배우만 받을 수 있는 도시락 하나에도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남은 반찬이면 어때서? 단체 도시락보다야 훨씬 낫지!’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말투가 점점 거만해졌다.
“서영 언니가 주는 거예요. 얼른 받아요.”
윤라희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는 마치 상대 마음속까지 꿰뚫는 듯했다.
그 눈빛에 매니저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움찔했고 피하듯 시선을 흩뜨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얼른 받아요.”
윤라희는 그제야 손을 뻗어 도시락을 받았다.
“서영 언니가 일부러 챙겨준 거예요. 고마운 줄 아세요.”
그러고는 얼른 조서영에게 보고하러 돌아갔다.
윤라희는 손에 든 도시락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서영의 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서영은 팀 내 최고 스타였기에 방해받지 않도록 그녀의 차량은 촬영장 한쪽 조용한 구석에 따로 세워져 있었다.
밴 쪽으로 향하던 매니저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리던 찰나 도시락 하나가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