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5화

조서영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촬영을 막 시작하려던 감독에게 다가간 조서영은 몸이 좋지 않다며 오늘은 대역을 써서 낙수 장면을 먼저 찍자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감독은 당장이라도 카메라를 집어 던지고 싶었다. ‘다 세팅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아프다고?’ “죄송해요, 정말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오늘은 무리예요.” 조서영은 미안한 척하며 말했다. 감독은 참을 만큼 참다가 씩씩대며 장면을 바꾸러 갔다. 오늘 갑자기 물속 액션 신을 찍는다며, 그것도 전부 대역으로 처리한다는 말에 윤라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젯밤 열은 내렸지만 아직 다 나은 건 아니었다. 머리는 멍하고 몸에 기운도 없고 아직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감독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채고 물었다.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윤라희는 아무런 표정 없이 대답했다. ‘그냥 물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는 정도겠지.’ 그 정도로 예민하게 굴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서영의 뻔뻔함을 너무 얕봤다. 조서영은 연신 불만을 쏟아내더니, 결국 나중에 찍기로 한 물속 장면들까지 전부 오늘로 몰아서 촬영을 시작했다. 결국 윤라희는 하루 종일 물속에 있어야 했고 와이어에 매달려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촬영이 끝날 무렵엔 거의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감독이 그제야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하루 휴식을 주겠다고 했다. 마침 내일은 경연 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윤라희는 감사 인사를 건넨 뒤 해열제를 사러 갔고 자기 전 여러 알을 한꺼번에 삼켰다. 그런데도 다음 날 고열이 다시 찾아왔다. 원래부터 회복이 덜 된 상태였는데 하루 종일 물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몸도 축 늘어져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침을 대충 먹고 해열제를 또 삼킨 뒤, 한여름임에도 긴팔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대회는 오전 10시에 시작이었다. 그 전에 잠깐 차도겸의 집에 들러 서류봉투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니 그도 집에 있을 터였다. 이혼 후 차도겸은 회사 근처에 있는 고급 빌라로 거처를 옮겼다. 윤라희는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갔지만, 경비에게 가로막혔다. 서류봉투를 경비실에 맡기려다 안에 든 물건이 워낙 고가여서 분실될까 염려되어 그에게 직접 연락했다. “무슨 일이야.” 낯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라희는 잠시 멍해졌다. 참 오랜만이었다. 익숙하지만 이질적인,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돌려줄 게 있어서. 경비실에 맡기고 갈게.” 차도겸은 원래 집사에게 나가서 받아오라 하려 했지만, 문득 어젯밤 병실 침대 위에 창백하게 누워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말했다. “잠깐 기다려. 마침 나가려던 참이니까, 내가 갈게.” “...” 지금 막 아홉 시였다. 이대로 그를 기다리면 대회 시간에 맞추긴 빠듯했지만 이미 전화는 끊긴 뒤였다. 윤라희는 그가 빨리 나오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차도겸은 원래 걸어서 나가려 했지만 아까 내뱉은 말을 떠올리고는 옷을 갈아입고 차를 몰고 나왔다. 멀리서부터 얇은 거문고 가방을 멘, 앳돼 보이는 한 여자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차를 그녀 옆에 세웠다. 윤라희는 급한 기색으로 차 쪽으로 다가가 봉투를 내밀었다. “도... 이건 이 비서가 주셨던 서류야. 돌려주러 왔어.” 뭐가 불만인 건지, 차도겸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분위기가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윤라희는 열이 올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차도겸은 그제야 그녀의 입술이 새하얗고 볼에는 불그스름한 열기만 돌아 있는 걸 알아챘다.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지쳐 있었고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 아파?” “괜찮아. 이거 돌려주러 왔어. 이만 가볼게.” 그녀가 건넨 서류를 차도겸은 받지 않고,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 느껴진 뜨거운 열기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의사가 어제 열은 내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하루가 지났는데도 왜 아직 이러고 있는 거야. 젠장, 몸도 안 좋은데 대체 뭐 하러 밖을 돌아다녀!’ “타.” 차도겸의 말투는 단호하고 차가웠다. 윤라희는 열 때문에 멍한 상태였고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기어이 인내심을 잃은 차도겸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더니 그녀를 그대로 안에 밀어 넣었다. 뭔가 말하려던 윤라희는 그가 내뿜는 싸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병원 가는 방향과 경연장 가는 방향이 겹쳐 있었고 차도겸의 속도라면 병원에서 약만 사서 가도 늦진 않을 터였다. 차 안은 숨 막히게 조용했다. 윤라희는 말없이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 자주 만나진 못해도 마주할 때마다 분위기는 편안하고 따뜻했다. 말수는 적고 늘 무표정하던 그였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는 다정했고 그녀 기분을 배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민망하게 만드는 일도 차갑게 대하는 일도 없었다. ‘언제부터일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 건...’ 아마도 결혼 이후부터였던 것 같았다. 열여덟 살 생일 밤의 그 일, 그날 이후로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병원에 도착한 차도겸은 아무 말 없이 먼저 걸어갔고 윤라희는 황급히 뒤따랐다. 그는 걸음이 빨랐다. 마음이 급한 건지, 화가 난 건지, 보폭이 크고 빠르기까지 했다. 윤라희는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듯 걸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무거운 상태였기에 이내 이마엔 땀이 맺혔다. 그런데 그의 걸음이 살짝 느려졌다.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덕분에 그녀는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의사가 체온을 재보더니 39도 고열이라며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안 돼요.” 윤라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어요. 약만 주세요.” 의사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윤라희 씨, 열이 심하고 경과 시간도 긴데요. 가능하면 주사를...” 그때 옆에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주사 놔주세요.” “싫어.” 윤라희는 단호히 거절했다. 차도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동자는 검은 심연 같았고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오늘 경연이 있어서 지금 가야 해.” “무슨 경연?” “국악 경연대회.” “그딴 대회가 그렇게 중요해? 아픈 몸 끌고 나갈 만큼?” 차도겸의 말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윤라희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딴 대회 아니야. 그리고 대회가 어떻든 참가하는 이상 최선을 다할 거고.”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 이제 가볼게.” 무슨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차도겸의 얼굴이 금세 냉랭하게 굳어졌다. 차도겸은 갑자기 그녀의 팔을 붙잡아 다시 자리에 앉히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사 놔주세요.” 그렇게 말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윤라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주사를 극도로 무서워했다. 간호사가 의료 트레이를 들고 다가오는 걸 보고는 진심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따뜻한 품에 안기고 말았다. 너무 익숙하고 편안한 품, 윤라희는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그 순간, 차도겸의 몸이 굳어졌다. 분명 서로 가장 가까웠던 적도 있지만 그날 밤은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억도 흐릿했다. 결혼 후 함께 잠은 잤지만 한 번도 서로를 만진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건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처음으로 맞닿은 순간이었다. 밀쳐낼지 말지 고민하던 그는 창백한 윤라희의 얼굴을 보고는 결국 가만히 있었다. 해열 주사는 엉덩이에 놔야 했는데, 오늘 그녀는 긴팔 원피스를 입고 있어 옷을 내릴 수 없었다. 간호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치맛단을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 희고 가느다란 종아리가 드러났고 치맛단이 허벅지까지 올라오자, 간호사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차도겸을 바라봤다. 그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보는 게 뭐 대수냐는 듯, 관심 없는 척 시선을 피했다. ‘뭐, 못 본 것도 아니고.’ 간호사가 주사를 놓자, 윤라희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찔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는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읏...” 차도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간호사를 향해 한마디 했다. “좀 안 아프게 놓으세요.” 그러고는 눈에 들어온 윤라희의 희고 곧은 다리를 본 순간, 정작 그녀보다도 그의 몸이 더 굳어버렸다. 차도겸은 괜히 태연한 척 시선을 피했다.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