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윤라희는 조서영을 상대할 힘조차 없었다. 정신을 붙들기 위해 허벅지를 세게 꼬집고는 간신히 의식을 부여잡은 채 거문고를 안고 무대 위로 올라섰다.
조서영의 무대는 이미 오늘 경연의 절정을 찍었다. 그녀가 내려온 뒤에도 관객석의 분위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그러나 윤라희가 무대에 오르자 조금 전까지의 환호는 순식간에 냉소와 비난으로 뒤바뀌었다.
“윤라희? 얘가 왜 나와! 꺼져! 꺼지라고. 누가 이런 걸 보고 싶어 해!”
“와, 진짜 못생겼다. 얼굴이 완전 귀신이잖아. 성형 다 망했네.”
“이 여우는 어디든 기어 나와. 거문고 연주할 줄이나 알아? 또 조서영 따라 하는 거 아냐?”
“조서영이 거문고 하니까 또 따라 하네. 대역 출신 주제에 자기보다 잘된 거 보기 싫어서 눈에 불 켠 거 봐라.”
“진짜 악질이다 악질. 윤라희는 그냥 연예계 떠나! 역겹다고!”
“윤라희 꺼져라!”
“윤라희 꺼져라!”
관객석은 격앙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몇몇 과격한 관객들은 무대 위로 생수병을 던지기까지 했다. 현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스태프들이 급히 질서를 정리하고 나섰다.
컴퓨터 앞에 앉은 시청자들 역시 욕설과 비난을 쏟아내며 실시간 채팅창을 도배했다. 거친 말들이 화면을 뒤덮었다.
윤라희는 무대에 놓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발치에 떨어진 생수병을 흘끗 내려다보곤 아무런 표정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거문고의 음을 다시 조율한 뒤, 무대 앞 고정 마이크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윤라희입니다. 오늘 제가 연주할 곡은 [꽃]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객석은 다시 폭발했다.
“[꽃]?! 우울한 거문고의 끝판왕 [꽃]?! 윤라희 미쳤나 봐!”
“하하하하 쟤 제정신이야? 지금 멘탈 나간 거 티 내는 중?”
“아니, [꽃]을 끝까지 치고 우울증 안 걸린 사람 있긴 함? 얘 진짜 인생이 너무 즐거워서 자학하나 봐. 미친 거 아냐?”
무대 뒤 대기실에서 조서영은 순간 움찔했지만 이어진 윤라희의 곡 소개에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조서영은 걱정을 접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 곡을 고르다니, 윤라희는 제 무덤을 판 거나 마찬가지였다.
[꽃]이라는 곡은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울한 거문고’라 불릴 만큼 극단적인 절망과 무기력함을 품은 멜로디로 웬만한 사람은 감정적으로 버텨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 곡의 작곡자는 당시 무명이었던 어느 거문고 연주자로 [꽃]을 작곡하던 도중, 감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곡은 미완이었다.
일각에선 그녀가 의도적으로 곡을 끝내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불완전한 곡으로, 부서진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라며 결국 이 곡은, ‘도달하지 못한 끝’을 이야기하는 곡이다.
수백 년이 흘렀지만 아무도 이 곡을 완주한 사람이 없었다.
중도 포기하거나, 연주 후 극심한 무기력과 우울로 삶이 무너지는 경우가 잇따랐다.
지금 윤라희가 이 곡을 선택한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무대 앞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며 조서영은 여유롭게 물 한 잔을 들었다.
마치 좋은 구경거리를 만났다는 듯 그녀의 표정은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
무대 중앙에 홀로 앉은 윤라희는 고개를 숙이고 거문고 여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곡의 감정선과 자신을 겹쳐보았다.
여름의 마지막 꽃. 그것이 피고 나면 더 이상 피어날 꽃도 물러설 길도 없다. 그것은 끝을 향한 서글픈 징표였다.
절망과 허무, 끝내 지워지지 않는 상처, 그리고 한 여인의 잊힌 청춘.
[꽃]은 그런 것들을 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말하고 있었다.
거문고 여인은 봉건 사회에서 짓밟히고 모욕당했던 기생이었다. 웃음을 팔고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야 했던 그녀의 삶은 비참했고 절망뿐이었다. 젊을 땐 그 몸으로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미모가 시들자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끝없는 허무와 슬픔 속에서, [꽃]은 그녀가 자신의 처참한 운명에 저항하며 남긴 울분이자 절규였다. 삶에 대한 슬픔과 절망이 곡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다.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 [꽃]의 유래였지만 윤라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꽃]에 얽힌 이야기를 세밀하게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거문고 여인은 본래 고위 관리의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소녀 시절부터 함께한 소꿉친구가 있었고 마음 깊이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집안이 멸문당하면서 그녀는 노비로 전락해 가장 천한 신분인 거문고 여인이 되었다.
무너져버린 신분의 벽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던 소년에게 감정 하나 내비칠 자격조차 없었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 [꽃]을 썼다. 그리고 자결한 날은, 소년이 벼슬길에 올라 명문가 규수와 혼례를 올리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 소년은 훗날 이름을 남긴 역사적 인물이었고 윤라희는 그의 일대기를 읽다가 그 기록 사이에 아주 짧게 언급된 거문고 여인의 이야기를 찾아냈다.
윤라희는 그 여인이 어떻게 사랑했고 어떤 마음으로 그 곡을 남겼을지 상상했다.
‘꽃이 피면, 사랑은 끝난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마지막으로 피어나는 여름의 꽃. 피고 나면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아름다움도 머물 수 없다.
[꽃]은 젊음을 잃는 순간의 비애이자 가장 간절했던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이 곡이 운명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라고 말하지만 윤라희는 그보다는 말 한마디 꺼내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사랑을 거문고로 조용히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입술을 다문 윤라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슴이 은근하게 아렸다.
그 거문고 여인의 감정이 누구보다 그녀에겐 너무도 익숙했다.
윤라희 역시 누구보다 깊고 진하게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피기도 전에 져버렸다.
‘차도겸... 넌 영원히 모를 거야. 내가 18살 생일날, 너한테 고백하려 했다는걸. 내가 누구인지, 네게 어울리는 존재인지 상관없이...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난 전부를 걸고 노력했어. 연예계 최고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모든 시간이 다 너였어. 오직 한마디만 전하고 싶었어. 좋아한다고... 하지만 단 한 잔의 주스 때문에 그 말은 끝내 전하지 못했지.’
윤라희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과거를 되새기자 슬픔이 물밀듯 밀려왔다.
가냘픈 손끝이 거문고 줄을 부드럽게 쓸며 지나가자 낮고 절절한 음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울 듯 흐느끼고, 쓰러질 듯 비통한 곡조.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그 슬픔이 그대로 현장에서 울려 퍼졌다.
관객석의 분위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치 윤라희의 감정에 이끌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사연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듯했다.
가늘고 여린 손이 거문고 줄을 느리게 훑으며 눈을 감은 소녀의 속마음이 곡에 실려 하나둘 전해졌다.
붉은 입술에 맺힌 말은 끝끝내 터지지 못한 채 삼켜졌고 속눈썹엔 이내 눈물이 맺혔다.
‘한때는 같이 늙어가고 싶었고 서로의 손을 잡고 긴 세월을 건너고 싶었지만... 그 사랑은 이미 끝났고 이제는 혼자서 그리움에 갇혀 살아간다...’
차도겸은 무대 뒤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녀의 음악이 마치 심장을 울리는 듯 마음 어딘가에 가라앉았다.
무대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차도겸. 그는 안다. 무대 위에 앉아 있는 그 소녀는 한때 자신이 가장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라는걸.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가 그날 윤라희의 생일을 위해 준비했던 고백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얼마나 정성을 들여 계획했는지.
윤라희를 위한 반지와 카드, 선물, 모두가 헛된 일이 되어버리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차도겸이 기다렸던 건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그의 품으로 뛰어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한밤중 몰래 파파라치가 터뜨린 스캔들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그의 침대로 올라왔고 기자까지 데려와 온 세상 앞에서 ‘정략적인 관계’를 만들어낸 그날 밤 그에게 남은 건 조롱뿐이었다.
그 순간 차도겸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도, 윤라희를 위한 고백도, 사랑도 다 물거품이 됐다.
윤라희가 원한 건 사랑이 아니라 재벌가 안주인 자리였다. 그 모든 노력은 결국 허상이었고 그가 사랑한 사람은 그런 여자였다.
차도겸은 더는 곡을 듣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무대 위 윤라희를 한 번 바라본 뒤,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슬픔에 잠긴 채 거문고에 몰입해 있던 윤라희는 마치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차도겸이 서 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