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드레스는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를 완벽히 감쌌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은 고급스러운 기품을 더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톱스타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윤라희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국내 상위 재벌가 하씨 가문의 외동딸이며 지금 국내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는 여배우 하유선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생일도 같고 나이도 같았다.
전날 밤, 바로 하유선이 함께 생일을 보내자며 윤라희를 불러냈다.
윤라희의 눈가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런 윤라희를 보며 하유선은 느긋하고 오만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라희야, 괜찮아?”
윤라희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유선아, 나 어떡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돼버린 거야... 분명 술은 안 마셨어. 과일주스였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하유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미소엔 묘한 장난기가 어렸다.
“왜냐하면 네가 마신 과일주스에 뭘 좀 넣었거든.”
“...뭐라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윤라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유선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뻔뻔하게 덧붙였다.
“어젯밤 네가 마신 그 주스 말이야. 내가 일부러 손댔어. 그런데 사실 어제뿐 아니라, 2년 전 네 생일날 마신 주스에도 똑같이 넣었지.”
그 말이 뇌리를 때리자 윤라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믿기 힘든 충격에 더해 온갖 감정이 뒤엉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유선은 그런 윤라희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그래, 바로 이 표정이야. 너무 좋아. 더 괴로워하고 더 아파하고 더 절망해. 그래야 내가 즐거우니까.’
“왜 그랬어!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윤라희는 참아왔던 감정을 터뜨리듯 절규했다. 격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는 거칠게 흔들렸다.
“하유선! 나 너한테 잘못한 것도 없잖아! 왜 날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거야!”
윤라희의 눈물 어린 외침에도 하유선의 눈에는 딱 하나의 감정만이 담겨 있었다. 그건 바로 혐오였다.
‘왜냐고? 그거야 차도겸이 널 좋아하니까.’
분명 하유선과 차도겸은 어릴 적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사이였고 그녀가 먼저 그를 좋아하게 됐다. 둘은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었다.
‘윤라희 너 따위가 뭔데, 나보다 늦게 나타나선 차도겸의 마음을 가져간 거야. 그저 연예계에서 누구나 쉽게 손댈 수 있는 창녀 주제에 감히!’
하유선은 윤라희를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차도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윤라희의 그림자까지 모조리 지워버리기 위해 그녀는 무려 2년을 준비했고 심지어 윤라희를 차도겸의 침대로 보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 차도겸은 윤라희를 사랑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감정이라곤 혐오와 증오뿐이었다. 물론 하유선은 절대로 윤라희가 차도겸에게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둘 생각이 없었다.
“왜냐고? 넌 역겨우니까. 탓하고 싶으면 너 자신을 탓해. 내 앞길 막은 건 바로 너니까.”
그 말에 윤라희는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내가 앞길을 막았다고?’
배경도 없고 힘도 없는 연예계 소속 여배우일 뿐인 자신이 어떻게 도원시에서 손꼽히는 재벌가 외동딸인 하유선의 앞길을 막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스쳤다. 당시, 자신은 소속사에서 톱스타로 불렸고 하유선은 한참을 밀려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매장당한 뒤, 그 자리를 꿰찬 사람이 하유선이었다.
‘설마... 자기가 톱스타가 될 길을 내가 가로막았다는 거야?’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무도 비참하고 한심해서 윤라희는 허탈하게 웃었다. 웃다 보니 눈물이 났다.
‘내가 이런 사람을 친구라고 믿고 따랐다니...’
그 모습을 본 하유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너도 참 어지간히 멍청하지. 내가 그렇게 널 망가뜨렸는데도 의심 한 번 안 하고 끝까지 믿고 따르더라. 절친 행세할 때마다 진짜 웃겨 죽는 줄 알았어.”
하유선은 혐오를 감추지 않은 눈빛으로 윤라희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있잖아, 라희야. 내 연기 실력이 늘게 해준 건 다 네 덕이야. 네 앞에선 진짜 잘해야 했으니까. 그게 다 연습이 됐던 거지.”
잠시 말을 멈췄던 하유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너희 아빠 그 사람은 너무 똑똑했어. 나에 대해 알아냈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옥상에서 살짝 밀었어.”
“...뭐라고?!”
윤라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늘고 긴 눈매가 크게 열리며 안에서 솟구친 분노와 증오가 거의 사람 하나를 찢어버릴 듯 일렁였다.
하지만 윤라희가 다가가기도 전에 하유선이 먼저 손을 휘둘렀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윤라희는 휘청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무릎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히자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얼굴이 창백해졌고 온몸이 떨려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하유선은 그런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맞아. 너희 아빠 내가 죽였어. 입이 너무 험하더라고. 기분 나빠서 그냥 저세상 보내줬지. 아, 그리고 너 그때 넘어져서 유산했잖아? 그것도 내가 시킨 거야.”
윤라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넋이 나간 채 하유선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모든 게 다 하유선이 꾸민 짓이었어! 나를 이 지옥으로 밀어 넣은 것도!’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챈 하유선은 윤라희의 머리채를 쥔 손에 힘을 주어 거칠게 뒤로 잡아당겼다.
“아악!”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은 고통에 윤라희는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화났어? 표정 좀 봐, 진짜 우습다.”
“나 고소할 거야! 하유선, 너 절대 가만 안 둬!”
하유선은 천천히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고소한다고? 너 따위가? 웃기지 마. 네 말을 누가 믿어? 넌 그냥 싸구려 기생충일 뿐이잖아. 증거 있어? 오히려 내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감옥 가는 건 너야.”
마치 더러운 쓰레기라도 내던지듯 윤라희의 머리채를 거칠게 놓아버린 하유선은 곧바로 티슈를 꺼내 손을 하나하나 꼼꼼히 닦아낸 뒤, 그 티슈를 윤라희 얼굴에 던졌다.
“윤라희, 너 이제 아무것도 없어. 진실을 안들 뭐해? 넌 나한테 아무것도 못 해. 하하하...”
하유선은 광기 어린 웃음을 남기고 하이힐 소리를 또각거리며 떠났다.
진실을 알아도 복수할 수 없고 세상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면, 원한을 풀 수도,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복수였다.
윤라희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린 채 오열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뼛속 깊이 절망이 스며든 울음이었다.
이 모든 비극은 결국 단 한 사람의 치밀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녀를 부끄러워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었고 아이 역시 우연히 잃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아무것도 막아내지 못했다.
너무 나약하고 무능했기에 남의 손아귀에서 놀아났고 너무 어리석고 미련했기에 남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가족도, 인생도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결국 이 모든 건 다 그녀의 탓이었다.
뼈를 깎는 고통과 절망, 자책이 날 선 칼날이 되어 가슴을 가차 없이 후벼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몸이 저릿하게 굳어갈 무렵, 윤라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눈물을 닦은 눈동자엔 더 이상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남은 건 단 하나, 절박한 분노뿐이었다.
그녀에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을 이제 하나씩 되찾을 것이다.
피로 맺은 원한, 피로 갚게 하리라.
...
윤라희는 멍하니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 소파에 차도겸의 비서가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경을 쓴 단정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고 손에는 서류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윤라희도 알고 있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자 머릿속이 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윤라희는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 모든 게 지겨웠고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이 지긋지긋한 결혼 생활도, 허울뿐인 관계도 끝내고 싶었다.
이주성은 곧바로 일어서서 그녀 앞에 서류를 내밀며 공적인 말투로 말했다.
“윤라희 씨, 이건 이혼합의서입니다. 확인해 보시고 문제가 없다면 서명 부탁드립니다. 현재 거주 중인 이 별장과 차량 세 대는 대표님 명의에서 귀하께 이전되며 추가로 위자료가...”
“필요 없어요.”
윤라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람한테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
존엄도 자존심도 진작에 내려놓은 그녀였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짓밟히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그 진심만큼은 증명하고 싶었다.
펜을 든 윤라희는 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잠시 멈칫했다.
이름 석 자를 쓰면 그녀와 차도겸은 완전히 남남이 될 터였다.
당시 그녀는 법적으로 혼인이 가능한 나이에 미치지 못해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고 두 사람은 그저 계약서 한 장으로만 이어져 있었다.
결국 이 서명 하나로 모든 관계가 끝나는 셈이었다.
단 한 순간 망설였지만 윤라희는 곧 단호하게 이름을 써 내려갔다.
안녕, 차도겸.
안녕, 내 사랑.
안녕, 과거의 윤라희.
지금 이 순간부터 세상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착했던 윤라희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오직 복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