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여수민은 활짝 웃었다. 볼 옆에 패인 보조개가 깊게 잡혔다.
그녀는 김미숙이 정말 좋았다.
휴대폰을 꺼내 설명을 적었다.
[선생님, 저 아까부터 와 있었어요. 선생님이 말씀 나누고 계셔서 방해하지 않았어요.]
김미숙은 여수민을 거의 2년 가까이 가르쳤고, 따로 과외처럼 봐 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꽤 잘 알고 있었다. 솔직하고, 단순한 아이였다.
그녀는 여수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저기 가서 앉아 있어. 나 일 좀 정리하고, 이따가 네 과제 볼게.”
여수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자리로 가서 이젤을 세웠다.
그 자리는 창가 쪽이었고, 그녀는 몸을 약간 옆으로 돌려 앉았다. 시야 끝으로 옆쪽에 서 있는 셋을 볼 수 있는 각도였다.
김미숙의 아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김미숙의 의붓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시선이 동시에 쏟아지니 몹시 어색했다.
여수민은 입술을 꼭 다물고 살짝 몸을 옮겨 앉았다. 그들 쪽으로는 뒤통수만 보이게.
하준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소녀의 포니테일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너를 부른 건 성은이 때문이야. 내가 옆에 있어야 겨우 너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용기가 생긴다고. 어제 일은 다 들었으니까 넌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하준혁은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한 점에 고정했다.
그의 시야 안에는 한 폭의 그림이 있었다. 짙은 남색 배경, 밤, 낡은 집, 굽은 허리를 하고 계단을 오르는 노인.
종이를 뚫고 나오는 듯한 고독함이 있었고, 그 안에는 또 쉽게 꺾이지 않는 생명력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그림 실력, 감각, 관찰력. 어느 하나 빠지면 안 되는 것들.
타고난 재능이 빼어났다.
그래서 김미숙이 예외적으로 제자를 들였던 것이다.
하준혁은 그제야 문득 떠올렸다. 이 소녀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귀국하기 전, 부모님과 함께 있는 가족 단톡방에서, 어머니가 이 아이에 대해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다만 제대로 읽어 보지 않았을 뿐.
꽤 기묘한 인연이기는 했다.
하준혁은 딴생각을 하면서도 말했다.
“잘못한 건 벌을 받아야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김미숙은 아들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뭐든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 것 같지만, 진짜 건드리면 호락호락한 성질은 아니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
“증인도 있고 증거도 다 있으니까 경찰서에 넘기죠.”
하준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김미숙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반면 심성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엄마, 준혁 오빠, 걔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잠깐 정신이 나갔을 뿐이에요. 자기가 잘못한 거 안다고 어제 저한테 밤새 울었어요. 제 체면 좀 봐서 우리끼리 해결하면 안 될까요?”
김미숙은 미간을 찌푸렸다.
“성은아, 넌 너무 마음이 약해. 이런 애들은 따끔하게 혼을 내야 다음번에 또 같은 짓을 안 하는 거야. 안 그러면 언젠가 널 끌어들이면 어떡하려고?”
“아니에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제가 꼭 잘 말해 볼게요.”
심성은은 다가가 김미숙의 팔을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엄마, 저희 정말 오래 알고 지냈어요. 예전에 저를 괴롭히려던 나쁜 애들 쫓아내 준 적도 있다니까요. 나쁜 애는 아니에요. 그냥 준혁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이렇게 잘생겼는데, 누가 준혁 오빠를 안 좋아하겠어요...”
김미숙은 피식 웃었다.
“이걸 또 네 오빠 탓으로 돌리네? 세상에 잘생긴 남자는 널렸어.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사람한테 약을 타? 네 친오빠도 잘생겼어. 만약 누가 그 애를 노려서, 나중에 너희 집안 안주인 행세를 한다고 생각해 봐. 너희 엄마가 좋게 보겠니?”
심성은은 말이 막혀 입술을 깨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온화하고 말도 잘 들어줄 것 같지만, 김미숙은 원칙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쉽게 마음을 돌리기 어려웠다.
그녀는 울상으로 하준혁 쪽으로 다가가 사정을 해 보려 했다. 그러나 다가가는 순간, 그의 팔에 손이 닿기도 전에 하준혁 눈동자 안쪽에 서린 짙은 어둠에 겁부터 났다.
하준혁은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 한마디 없이 시선을 내리꽂았다.
어제는 같은 무리 안에서 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이 모처럼 모여 술자리를 한 날이었다. 출발할 때 심성은도 함께였고, 투정 섞인 애교로 따라나섰다.
게다가 친구 몇 명까지 더 끌고 왔다.
분위기는 꽤 들떠 있었고, 사람도 많고 어수선했다.
하준혁은 막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차 적응도 완전히 되지 않은 상태였다. 편하게 기대앉아 몇 잔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아랫배에 뜨거운 불덩이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참을 수 있을 때, 그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심성은은 걱정된다며 끝까지 남으려 했고, 결국 서재헌이 억지로 끌고 나갔다.
그 뒤로 약기운이 본격적으로 올라와 몸이 팽팽하게 타들어 가는 것처럼 괴로웠고, 그는 먼저 혼자서 어떻게든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서재헌은 어디선가 여자를 하나 불러왔고, 룸 카드까지 들고 와서 그 여자는 들어오자마자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하준혁에게는 강한 자제력과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그는 싸늘하게 나가라고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었고, 아무 여자에게도 손 한 번 잡히지 않았다.
그다음이 벽 너머를 훔쳐 듣는 걸 좋아하는 어느 소녀가 들이닥친 순간이었다.
긴장해서 숨소리를 죽이지 못했고, 스스로는 잘 숨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그의 거친 숨과 뒤섞여서 말이다.
하준혁은 생각을 거두고 무심코 옆을 힐끗 봤다. 손은 계속 움직이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귀는 분명 쫑긋 세워져 있는 아이가 있었다.
“내가 정한 일이에요. 더 이상 반대 안 했으면 좋겠네요.”
심성은은 그 몇 마디와 몇 번이고 날아온 냉혹하고 정 없는 눈빛에 금세 눈가가 빨개졌다.
억울하게 서 있다가,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김미숙은 아들을 한 번 흘겨보았다.
“하준혁, 왜 그렇게 사납게 말해? 착하게도 말할 수 있잖아. 성은이가 너보다 여덟 살이나 어려. 네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야, 알지?”
심성은은 겨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엄마. 제가 철이 없어서 둘 다 난처하게 만들었네요. 그럼 준혁 오빠 말대로 할게요. 저 더 이상 마음 약하게 안 굴어요.”
“그래, 그게 맞는 거야. 잘못한 건 어디서든 벌을 받아야 해. 자, 이제 준혁이가 널 데려다 줄 거니까, 시간 날 때 다시 집에 와서 밥 먹어.”
김미숙은 부드럽게 달랬다.
심성은이 말하기도 전에 하준혁이 먼저 담담하게 거절했다.
“저는 용건이 있어서요. 성은이는 혼자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요.”
둘은 나이 차도 꽤 났고 집안끼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왕래는 잦았다. 하준혁과 심씨 가문의 장남, 즉 심성은의 오빠 심승욱이야 같은 바지 입고 자란 죽마고우였어도, 이 의붓여동생과는 사실 그다지 가깝다고 할 수 없었다.
하준혁은 열여섯 살 때 미국으로 떠났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창업을 시작했고, 심성은과는 명절 때나 얼굴이나 비추는 사이였다.
그는 이런저런 번거로운 걸 싫어했고, 울고불고 달래 달라고 하는 아가씨 타입은 특히 좋아하지 않았다.
시끄러웠다.
참, 시끄러웠다.
김미숙은 그런 아들을 흘겨보며, 의붓딸의 눈가가 또다시 촉촉해지는 것을 보고는 직접 나서서 달래 가며 아래층까지 배웅했다.
둘이 내려가자 하준혁은 곧장 여수민의 등 뒤로 가서 섰다.
이젤 옆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여수민...”
그는 혀끝에서 그 두 글자를 굴리듯 이유 없이 천천히 불러 보았다.
“또 엿듣네요.”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여수민의 귀는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표정은 나름 침착했다.
알고 보니 어젯밤 그가 전설 속의 어떤 약을 맞아서 룸 안에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문 앞에서 마주쳤던 그 예쁜 여자도...
여수민은 궁금해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저도 모르게 떠올랐을 뿐이었다.
이 남자는 의외로 몸을 꽤 가리는 사람 같다고. 아무 여자하고나 쉽게 자서 약기운을 풀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말이다.
‘아마 교수님이 아들을 잘 가르친 덕이겠지.’
여수민은 옆에 두었던 노트와 펜을 집어 들고 이렇게 썼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말씀하시는데, 제가 못 듣는 게 더 어려워요.]
하준혁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글씨 예쁘네요. 원래 그림이랑 글씨는 하나만 제대로 하라던데, 어떻게 둘 다 잘해요?”
명백한 칭찬이었는데도 여수민은 어쩐지 불편했다.
그녀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김미숙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화실 안 공기도 옅어진 것만 같았다.
하준혁이라는 남자는 존재감도, 기세도 너무 강했다.
무례해 보이고 싶지 않아 여수민은 다시 펜을 들어 적었다.
[교수님 글씨가 훨씬 예뻐요. 그러니까 들으신 소문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 같네요.]
하준혁이 막 그 문장을 다 읽었을 때, 김미숙도 돌아왔다.
여수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어젯밤에 그녀가 교수 아들의 꽤 사적인 장면을 엿듣고 말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수민은 뒤에 선 그를 가림막 삼아 재빨리 노트에서 그 페이지를 뜯어 동글동글 뭉쳐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스프링 노트 고리에 남은 조각들을 떼어내고 있을 때, 김미숙이 다가와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