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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하준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자분 작품 좀 보고 있었어요.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신 건가 해서요.” 김미숙은 살짝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어디 하나만 꼽을 수가 있니? 다 괜찮으니까 그렇지. 너도 어릴 때 잠깐 그림 배웠잖아, 이 그림은 어떻게 보이냐?” 여름방학 전에 내줬던 과제였다. 김미숙은 막내 제자가 학업에 생활까지 바빠 제대로 못 그려 올까 봐 걱정했는데, 막상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꽤 만족스러웠다. 하준혁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구도가 안정적이고, 인물 형상도 분명해요. 붓질도 살아 있고, 표현력도 좋고요. 어머니 실력을 제대로 이어받았네요.” 앞부분만 들었을 때는 여수민도 부끄러웠다. 마지막 문장을 듣고 나서야 그게 김미숙을 향한 립서비스라는 걸 깨닫고, 얼굴이 더 붉어졌다가 다시 조용히 마음을 낮췄다. 김미숙은 우아하게 눈을 한번 굴렸다. “말하는 버릇은 하나도 안 고쳐먹었네.” 그녀는 곧 여수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민아, 이 그림은 한 가지를 좀 신경 써야 해. 사진이 주는 겉모습에 너무 기대면 안 돼. 그게 오래 가면 관찰력이 무뎌져. 네가 실제 장면을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걸 다시 떠올리면서 감정을 바탕으로 화면을 다시 짜야 해. 알겠니?” 여수민은 문득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마음속으로 크게 얻은 바가 있었다. 실제로 이 그림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었다. 그날 밤 집에 가는 길이 늦어 어느 할아버지가 힘겹게 허리를 굽히고 계단을 오르는 순간이 눈에 들어왔고, 그때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 장면이 떠올라 그대로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그릴 때도 장면 자체를 표현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고, 정작 그 순간 마음속에 스며들었던 감정은 붓끝에 실어 넣는 것을 잊고 있었다. 밤에만 있는 고유한 쓸쓸함과 서늘함, 그리고 늙어 가는데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의 체념 같은 것이었다. 어쩐지 항상 뭔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던 이유가 그거였다. 여수민은 고개를 돌려 눈빛을 반짝이며 김미숙을 올려다보았다. 궁금증과 배우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담긴 눈이었다. 그 표정만 봐도 더 알려 달라는 뜻은 분명했다. 김미숙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선생님이 몇 군데만 같이 고쳐 볼게.” 그녀는 나이프에 물감을 묻혀 노인의 등 뒤와 발밑, 그리고 계단의 어두운 그림자 부분을 중심으로 몇 번쯤 손을 보았다. 곧바로 오래되고 낡아빠진 기운이 화면 밖으로까지 밀려 나왔고, 노인의 뒷모습에는 한층 더 쓸쓸한 공기가 감돌았다. 여수민은 스스로가 부끄러워 더 집중해서 김미숙이 말하는, 유화를 그릴 때 감정과 기교를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하준혁은 그런 이야기가 지루했다. 그는 창가에 기대서서 손가락 사이에서 연필 한 자루를 굴리며 심심풀이 삼아 갖고 놀았다. 가끔씩은 고개를 돌려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눈빛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 여수민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준혁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어릴 때 몇 년 그림을 배우다가 재미없다고 그만두었고, 김미숙의 장황한 설명을 참아 들을 인내심도 별로 없었다. 지금처럼 조금만 들으면 바로 졸음이 몰려오는 타입이었다. 하준혁은 몸을 세우더니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 내밀었다. 그리고 김미숙 눈에는 안 보이는 각도에서 살짝 여수민의 가느다란 발목을 발끝으로 톡 건드렸다. 여수민은 움찔하며 곧바로 허리를 세우고 반사적으로 발을 거두어들였다. 두 다리도 단정히 모았다. 크림색 앞치마 자락이 다리 사이에서 구겨지며 한 줄로 접혔고,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떨어뜨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마감이 매끈한 검은색 구두 코였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감히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최대한 무시하려 애쓰며 다시 김미숙 쪽에 귀를 기울였다. 하준혁은 웃음을 삼키고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었다. 다리를 자연스럽게 뻗어 둔 채, 길이에서 오는 이점을 활용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한번 슬며시 발을 뻗었다. 손에는 여전히 연필 한 자루가 들려 있었고,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태평해 보였다. 여수민은 견디기 힘들었다.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고, 발목을 따라 스치는 차가운 가죽 감촉이 온몸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아마도 화실에 이것저것 쌓인 게 많아서, 키 크고 다리까지 긴 그가 앉으면 공간을 많이 차지할 수밖에 없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여수민은 더 이상 피하지 않기로 했다. 자세를 곧게 세우고 예의 바르게 앉아 노트에 글자를 적어 가며 김미숙에게 질문을 이어 갔다. 김미숙은 꽤 오랜 시간 세세하게 짚어 주었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눈빛과 손끝에 특유의 영감과 끈기가 배어 있는 제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숨김없이 다 알려 주었다. 어느 정도 설명을 마치고 나서야 말했다. “이 그림은 이 정도면 됐다. 잘 말려서 바니시 바르고, 선생님이 아래층 전시실에 걸어 줄게. 이 기간에는 매일 나와서 연습해. 그림은 게을러지면 안 돼. 아, 그리고 재료나 도구 같은 거 여기 있는 거 마음대로 써.” 여수민은 온몸이 다 들썩일 정도로 벅찼다. 자기 그림이 벌써 전시실에 걸려서 그 대가들 작품이랑 나란히 있게 된다니 말이다. 막 들뜬 마음이 치솟으려던 찰나 김미숙이 화구까지 공짜로 쓰라고 하자, 그녀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노트에 적었다. [교수님, 도구는 제가 직접 가져올게요. 교수님한테 민폐 끼치면 안 돼요.] 김미숙은 그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너는 내 제자야. 나중에 내 뒤를 이어야지. 지금은 그냥 선투자야 선투자. 나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러면 나 진짜 서운하다.” 여수민은 김미숙이 자기 형편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돌려 표현하는 거라는 것도 말이다.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어로 ‘감사합니다’를 전했고, 노트에는 나중에 꼭 보답하겠다는 말을 또박또박 적어 넣었다. 그러고는 조금 어수선한 웃음을 지었다. 김미숙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아들을 돌아보며 바로 말했다. “앉은 자세 좀 봐라. 너 나이가 몇인데 그렇게 퍼질러 앉아 있어. 얼른 일어나. 아까 나한테 할 말 있다며? 나 시간 있을 때 얼른 해.” 하준혁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거 아니고요. 성은이 기사 노릇은 못 하겠다고요.” 김미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그럼 그냥 가. 여기서 빈둥거리지 말고. 그렇게 심심하면 회사라도 가서 네 아버지 일 좀 덜어 주든가...” 그러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아들의 팔을 잡아 복도로 데리고 나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면, 내가 말했던 몇 애들 한 번 만나 볼래?” 하준혁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문틈으로 안쪽에서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포니테일이 하나 보였다. “관심 없어요. 안 만나요.” 김미숙이 말을 이었다. “임씨 가문 그 아가씨는 발랄하고 귀엽고, 얼굴도 예쁘고, 학력도 집안도 다 흠잡을 데 없는데, 마음에 안 들어?” “너무 시끄러워요. 귀 아파요.” “그럼 유씨 가문 아가씨는? 조용하고 얌전하지. 얼굴도 청초하게 예쁘고, 전통화 전공이잖아. 넓게 보면 나랑 같은 미술 쪽이니까 말도 통하겠고.” 하준혁이 눈썹을 올렸다. “멍한 오리 같던데요.” 김미숙은 화가 치밀었다. “그만해라. 만난 적도 없으면서 평부터 찍지 말고. 미국 가더니 버릇이 아주 나빠졌네. 그 애들은 또 너를 꼭 좋아할 줄 아냐? 스물여덟이 되도록 여자친구 한 번 제대로 사귀지도 않고, 그 얼굴로 집에 들어오는 게 창피하지도 않니?” 하준혁은 말없이 방 안의 ‘고양이’를 떠올렸다. 적당히 조용하고,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있으면서도, 또 너무 요란하지는 않은 그런. 그 정도가 딱 좋았다. 김미숙은 또 말을 이었다. “아니면 성은이가 어때? 어릴 때는 좀 시끄럽고 제멋대로였어도, 크면서 점점 얌전해지고 착해졌잖아. 우리 집이랑도 사이좋고. 제일 중요한 건, 그 애는 어릴 때부터 너만 보면 그렇게 좋아했어.” 사실 김미숙도 의붓딸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래도 영 내키지는 않았다.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고, 무엇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사이라 마음이 복잡했다. “요즘은 다들 나이 차 난다고 뭐라 안 해. 네가 좋다면 나는 딱히 상관은 없고...” “저는 싫어요.” 하준혁은 담담하게 잘라 말했다. “함부로 커플 매칭 하지 마세요. 동생은 동생이에요. 그리고 성은이도 좀 말려요. 괜히 일 있든 없든 자꾸 저한테 오게 하지 말고요.” “흥.” 김미숙은 더 말하지 않았고 코웃음만 치고는 그대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 시각, 심성은은 자기 마세라티를 몰고 가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하고는 짜증스럽게 티슈를 뽑아 코를 한 번 닦았다. “이수연, 그만 좀 울어. 좁게 잡아도 며칠 구류지, 누가 죽인대? 총살당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이수연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차 안을 쩌렁거리게 울렸다. “성은아, 너 심씨 가문 큰딸이야. 하씨 가문에서까지 예뻐하는 공주인데, 그깟 일 하나도 못 부탁해? 나 구류 한 번만 하고 나오면 사람들 앞에서 다시는 못 서고, 이 바닥에서 어떻게 돌아다니냐고. 다들 나를 뒤에서 비웃을 거잖아!” 심성은은 짜증이 치밀어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준혁 오빠가 내 말은 아예 안 들으려고 하는데. 그거 다 너 때문이잖아. 약 탈 거면 과감하게 좀 하지 그랬어. 용량이 그 정도니까 일이 이렇게 되는 거지.” 이수연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무서웠단 말이야. 그 사람 눈빛이 너무 무서웠어. 칼날처럼 차갑잖아. 괜히 많이 먹였다가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성은아, 지금 와서 그 얘기 해 봤자 뭐가 달라져. 좀 도와달라니까. 나 진짜 구류는 안 돼.” 심성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경적을 몇 번이고 거세게 울려댔고 끝내 욕 한마디를 내뱉었다. “X발.” 이수연은 기가 죽어 움찔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성은아, 너도 알잖아. 그동안 내가 널 위해서 뭘 얼마나 했는지. 게다가 그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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