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비서가 설명했다.
“진초연 씨는 업무 관련 지식도 능력도 면접자 중 가장 뛰어났고 1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칭찬에도 성준수는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여자는 필요 없어.”
순간 진초연은 수치심에 휩싸여 한마디 외국어로 대담하게 비아냥거렸다.
“누구는 너 같은 노총각이 좋은 줄 알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준수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눈동자에 흥미로운 미소를 담았다.
“미안하지만 이 노총각이 외국어를 알아들어.”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진초연이었지만 남자의 미소 한 번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성준수가 다시 가볍게 말했다.
“외국어는 유창하네. 입사해서 일해봐.”
결국 진초연을 곁에 남겼다. 그때부터 진초연은 성준수 곁에서 성실한 엘리트 비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준수가 원수에게 암살을 당할 뻔하자 진초연이 그를 위해 칼을 막아냈다. 남자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애틋함이 가득했다.
“초연아, 너는 그냥 비서일 뿐이야.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랬다. 그녀는 단지 비서일 뿐이었다. 하지만 진초연 자신조차 언제부터 성준수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는지 몰랐다.
하이힐 때문에 자주 발에 상처가 났을 때 성준수가 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내 부드럽게 건네주던 때였을까.
아니면 접대 자리에서 성준수가 무의식적으로 의도가 다분한 술잔을 대신 가로챘을 때였을까.
어쩌면 경쟁자가 약을 타 함정에 빠뜨려도 극한의 욕망을 억누르며 그녀를 밀어냈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성준수가 말했다.
“초연아, 너는 비서야. 이익과 맞바꾸는 장난감도 아니고 내 방패막이도 아니야.”
그 순간, 진초연은 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성준수의 차가운 외면 아래 가장 부드러운 면모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를 위해 칼을 막아낸 그날 밤 진초연도 성준수에게 고백했다.
성준수는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왜, 이제는 내가 노총각인 게 싫지 않아?”
진초연은 붉게 물든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눈꼬리를 살짝 올린 채 유혹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화사하고 매혹적인 미소였다.
“싫어. 하지만 차가운 겉모습 속에 숨겨진 다정한 성준수가 안타까워서 그래. 항상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잖아.”
성준수가 멈칫했다가 이내 그녀를 끌어안고 깊게 입을 맞췄다.
그 후로 남자는 누구도 보지 않는 구석에서 진초연을 안고 입을 맞추며 그녀를 갈구했고 감정이 고조될 때면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마치 맑은 샘물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준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은 뒤 밤새 헬리콥터를 타고 러시아로 향했다.
진초연이 성지영을 처음 봤을 때 폐허 앞에 서 있던 여자의 흰색 원피스가 마치 만개한 백합꽃 같았다.
보자마자 성준수는 품에 가둘 기세로 으스러지게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마,”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했다.
성준수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진초연은 예민하게 감지했다. 남가 이 여자에게 품은 특별한 감정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사라지지도 않는 깊은 애정임을.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진초연의 숨을 조금씩 삼켜갔다.
잠시 후, 성준수는 여자를 보호하며 헬리콥터에 올랐고 성지영의 짐도 함께 실었다.
그러나 100미터도 날지 못했을 때 강한 기류가 휩쓸어 왔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기체가 너무 무거워서 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성지영은 세 개의 큰 캐리어를 꼭 껴안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준수야, 안 돼. 이건 내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너를 위해 고른 선물이라 버릴 수 없어.”
기내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몇 초 후, 성준수의 차가운 눈빛이 진초연의 얼굴을 스치며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가 뛰어내려. 무게를 줄여야 해.”
“뭐라고?”
순간 진초연의 귀에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낙하산이 있으니 괜찮아...”
성준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지영이 투정 부리며 끼어들었다.
“내 짐도 낙하산이 필요해. 저 여자가 가져갔다가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성준수는 반박하지 않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았어. 낙하산은 내 선물과 널 위해 남겨두자.”
진초연은 심장이 멎는 듯했고 숨마저 목구멍에 걸려 내쉴 수가 없었다.
“성준수, 여긴 헬리콥터야. 수백 미터 위에서 뛰어내리면 죽는다고.”
하지만 성준수는 고공을 차갑게 훑어보며 무서우리만큼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넌 비서야. 내 일을 해결하는 게 네 일이잖아. 게다가 지영이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어. 난 지영이를 잃을 수 없어.”
‘그럼 나는 잃어도 되고?’
황당함과 충격이 진초연의 얼굴에 교차하며 스쳤고 이어 비웃음이 떠올랐다.
예전엔 방패도, 도구도 아니라더니 그런데 지금은 성준수를 위해 죽는 것마저 그녀의 책임이란다.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
진초연이 비웃으며 남자의 터무니없는 명령을 거절하려던 순간 기내 문이 열렸고 동시에 기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진초연이 한쪽으로 휙 쓰러지자 성준수는 무정하게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안 돼!”
진초연의 몸이 급격히 추락했고 억눌린 목소리마저 강풍에 휩쓸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