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쿵!
진초연은 울창한 숲속에 요란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추락하는 동안 복부가 나뭇가지에 찔려 찢겨 나갔고 갈비뼈는 모두 부러졌다.
구조를 요청하려 입을 열었지만 밀려오는 쓴맛에 목이 메었다.
“쿨럭!”
한입 가득 피가 뿜어져 나왔고 온몸이 생생히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얼마나 오래 의식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진초연은 러시아 연합군에 의해 구조되어 긴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이곳 의료 물자는 극심하게 부족했고 그녀는 마취 없이 치료받아야 했다.
엄청난 고통이 사흘 내내 진초연을 괴롭혔다. 깨어날 때마다 이불을 깨물며 울부짖을 정도로 아파하다가 또다시 의식을 잃고 차가운 땀으로 침대 시트를 적셨다.
진양 그룹이 후계자 양성을 위해 군대에 단련시키러 보내지 않았다면 이국땅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진초연은 벽에 걸린 달력을 절망적으로 바라보며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한 달만 더 버티면 고통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어수선한 병실로 건장한 체구의 남자 몇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병실 문을 열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 비서님, 대표님께서 데리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녀를 떠올린 모양이다. 그만큼 성준수의 마음속에 진초연은 하찮은 존재였다.
곧 진초연은 귀국했다.
그녀가 심하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성준수는 드물게 일주일 휴가를 허락하며 자신의 별장에서 요양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동시에 진초연은 인사 발령서를 받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성준수는 다리를 꼬고 소파 중앙에 앉아 차가운 표정으로 무릎 위의 계약서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지영이 비서로 일해. 월급은 원하는 만큼 얘기해.”
웃는 진초연의 눈동자에 피가 맺힌 듯했다.
“성준수, 당신이 성지영 때문에 날 헬리콥터에서 떠밀어서 중상을 입은 채 돌아왔는데 나한테 또 그 멍청이를 돌보라고? 웃긴다는 생각 안 들어?”
이내 성준수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초연, 말조심해. 걔는 내 동생이야.”
그날 성준수가 떠난 뒤 진초연도 조사해 봤다.
성지영은 성준수의 이복 여동생으로 성격이 오만하고 놀기 좋아해 오랫동안 해외에서 여행 중이었다.
하지만 진초연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호칭만 여동생인 성지영이 사실은 성준수가 오랫동안 남몰래 마음에 품었던 여자라는 사실을.
진초연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동생? 정말 단지 여동생일 뿐이야?”
성준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계약서를 내던지며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넌 그저 비서일 뿐이야. 선 넘지 마. 지영이 일에 참견하지도 말고.”
말이 끝난 뒤 남자는 태연하게 일어나 진초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진초연은 계약서를 꽉 쥐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 난 고작 비서일 뿐이었네.’
진초연은 허탈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막 누워 숨을 돌리려던 찰나 휴대폰이 급하게 진동했다.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 성지영의 목소리였다.
“킹스 클럽으로 당장 와.”
진초연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난 비서지 웨이터가 아니야.”
그런데 성지영도 물러서지 않았다.
“진초연, 넌 지금 내 비서야. 항상 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거 몰라? 빨리 와.”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뚝 끊겼다.
계약을 위해 진초연은 힘겹게 일어섰다.
30분 후, 그녀는 클럽에 도착해 곧장 최상층으로 향하다가 한 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틈새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성준수가 보였다.
그의 손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는 차갑고 피곤해 보였다. 그 여심을 뒤흔드는 얼굴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친구가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
“성준수, 너란 놈 참 매력적이란 말이지. 내가 여자였다면 아마 너에게 넘어갔을 거야.”
성준수는 비웃었다.
“그만해. 내가 여자였어도 널 좋아하지는 않아.”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 알지. 진초연만 바라보느라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
그 말을 듣자 진초연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살짝 움츠렸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녀는 생각했다.
‘어쩌면 성준수는 성지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단지 오빠로서 책임감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까?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속에 품은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곧이어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성준수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틀렸어. 나는 진초연을 좋아하는 척하는 거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고 내게 충성하며 목숨 걸고 나를 위해 헌신하게 만들어서 지영이를 지키는 칼로 쓰는 거지. 알다시피 걔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잖아. 결국 누군가는 내 이름으로 걔를 위해 싸우고 모든 상처로부터 지켜줘야 해.”
“대단하네, 성준수. 사랑 한번 깊게 숨겼네.”
쿵!
무거운 충격이 진초연의 마음을 강타하며 산산조각 내버렸다.
절망이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스쳐 지나가며 통증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벽을 파고들 듯 힘을 준 손톱에서는 피가 새어 나왔고 눈물이 차오르며 코끝이 찡해졌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성준수의 진심을 따져 묻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진초연이 돌아서자 상대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