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제 말 들리시나요?”
의사가 진초연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하지만 병실 안에서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진초연의 귀에 아주 작게, 마치 천리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진초연은 무감각하게 고개를 저으며 핏기 없는 입술을 살짝 열었다.
“뭐라고요?”
곧이어 한 개의 회중시계가 그의 손에 들린 채 진초연의 귀에 닿았다.
2분 후, 의사는 성준수를 향해 무기력하게 고개를 저었다.
“왼쪽 귀가 청력을 잃었어요.”
한 마디가 희미하게 진초연의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귀에 닿았다.
그녀는 새하얀 천장과 성준수의 찌푸린 눈썹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성준수, 이제 만족해? 한 달만 있으면 내 계약이 끝나. 우리 헤어지자.”
성준수의 얼굴이 굳어지며 세상이 무너져도 태연할 것 같았던 표정에 마침내 균열이 보였다.
“제멋대로 굴지 마. 날 원망해도 되지만 떠나는 건 안 돼.”
한때는 달콤하게 들렸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습게만 느껴졌다. 떠나지 말라는 말은 가시 돋친 족쇄처럼 그녀의 목을 조여 숨이 막히고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너무 지치고 피곤했다.
“내 생일 파티에서 네가 내 여자 친구라고 발표할게. 그러면 지영이도 더 이상 너에게 그렇게 심하게 굴지 않을 거야.”
차가운 남자의 손끝이 진초연의 고통스러운 눈물을 닦아냈다.
눈빛에는 끝없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진초연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지만 말을 꺼내기 전에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아가씨께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순식간에 옆자리가 허전해지며 성준수가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갔다.
그가 떠난 뒤 단 한 명의 경호원만이 진초연을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지쳐 있었고 코끝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다.
좀 더 머물 수도 있었지만 진초연은 병원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문득 크리스마스에 성준수 일로 밤늦게까지 야근했던 게 떠올랐다.
새벽이 다 되어갈 무렵 회로가 단락되어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자동문과 난방이 완전히 멈춰버렸고 휴대폰도 충전하지 않은 탓에 진초연은 무려 두 시간 동안 갇혀서 추위에 떨었다.
몸을 웅크린 채 책상에 기대어 전기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성준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려고 진초연의 아파트 아래에서 한 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그녀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미친 듯이 진초연의 행방을 찾다가 그녀가 혼자 회사에서 야근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성준수는 유리창을 세게 부수고 휴대폰을 든 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체온이 담긴 외투를 진초연의 몸에 둘러주고 그녀를 안은 채 달려 나갔다.
희미한 가로등 빛이 남자의 단단한 옆모습을 비췄고 그의 따스한 온기가 뜨거움으로 번지며 그녀를 감싸주었다.
병실은 그날 밤 칠흑같이 어두운 사무실처럼 차갑지만 성준수라는 온기는 더 이상 없었다.
벌컥 별장 문을 열어젖히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성준수의 침실 앞에 다다랐을 때 진초연은 굳어버렸다.
안에서는 억눌린 신음과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달빛 아래 두 몸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준수야, 제발 나한테 줘, 응? 앞으로 네 말이라면 다 듣고 성씨 가문의 착한 아가씨가 될게.”
그림자 속에서 남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내뱉는 억눌린 숨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흔들리는 실루엣과 질퍽한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진초연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고 심장을 도려낸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한참 후, 그녀는 입을 막은 채 천천히 땅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후에도 성준수는 단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그녀를 존중한다고 했다.
진초연은 못된 마음이 들어 일부러 유혹하고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사무실 책상 가장자리에 슬쩍 올라앉았다.
혹은 화끈한 붉은 입술로 넥타이를 매어줄 때 일부러 남자의 목젖을 스쳤다.
하지만 성준수는 항상 딱딱하게 거절했다.
“내 처음은 가장 아름다운 내 신부에게 줄 거야.”
말하며 위로의 키스를 진초연의 이마에 새기고 자연스럽게 말캉한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착하지, 말 들어. 괜히 도발하지 말고 신혼 첫날밤을 기다려.”
진초연은 줄곧 그것이 성준수가 자신을 사랑하는 증거이며 그의 첫 경험 역시 오직 자신만의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진초연을 할퀴었다.
쾅!
진초연은 눈물을 닦고 발로 문을 걷어찼다.
찰칵!
손에 든 카메라가 그들을 정확히 겨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