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일어났어.”
여미주는 씁쓸함을 참으며 짧게 답했다.
진우진이 말했다.
“지금 포레스트로 데리러 갈 테니까 얼른 준비해. 본가에 다녀오자.”
“본가는 또 왜?”
그녀는 진씨 가문 본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곳엔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너 보름 넘게 안 갔잖아. 오늘 아침에 할머니가 전화까지 왔어. 휴가도 냈으니 얼굴 한번 비춰야지.”
여미주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문가희랑 같이 안 가? 병원에 혼자 내버려 둬도 괜찮겠어?”
말투에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었다.
진우진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뜬금없이 걔는 왜 끌어들여? 20분이면 집에 도착하니까 서둘러.”
그러고는 먼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여미주가 싸늘하게 웃었다.
‘문가희 얘기만 나오면 태도가 돌변한다니까? 양동생을 아주 끔찍이도 아껴.’
얼마 지나지 않아 코닉세그 한 대가 포레스트 앞에 멈춰 섰다.
어젯밤 문가희를 만나러 급하게 몰고 나갔던 그 슈퍼카가 이젠 그녀를 태우러 느긋하게 돌아온 걸 본 순간 왠지 모르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조수석 유리창이 내려갔고 진우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공주님 왜 이렇게 도도하실까? 내가 직접 차 문까지 열어줘야 탈 거야?”
여미주가 뭐라 하려던 찰나 진우진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돌아오더니 넌지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타시죠, 공주님.”
진우진은 그녀를 떠밀듯 차에 앉힌 다음 안전벨트도 매줬다. 슈퍼카가 출발할 때까지도 여미주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문가희가 옆에 없을 때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헛된 기대를 품곤 했다. 진우진이 그녀를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
만약 마음이 없다면 예전에 그렇게 비열한 방법으로 그와 잠자리를 가졌는데 왜 미치도록 괴롭히지 않고 되레 결혼했겠는가?
그녀는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진우진은 그런 그녀를 어두운 눈빛으로 곁눈질했다. 가는 길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닉세그가 진씨 가문 본가 앞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여미주는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녀의 미간에 드리운 그늘을 본 진우진도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결혼 전에는 참 잘 웃던 여미주였는데 요즘은 웃는 모습을 통 보기가 힘들어졌다.
진우진이 가볍게 헛기침하고 물었다.
“여미주, 어젯밤에 나한테 하려던 말이 뭐였어?”
여미주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가 언제 저택 앞에 멈춰 섰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진우진의 깊은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잠시 망설이다가 안전벨트를 꾹 움켜쥐었다.
이성이 그녀를 다잡았다.
“하고 싶었던 얘기는 우리...”
똑똑.
바로 그때 밖에서 누군가 조수석의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미주가 창문을 내리자 문가희의 얼굴이 나타났다.
문가희는 아프지 않는 날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늘 달고 사는 잔병치레 때문에 창백한 안색이 오히려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우진 오빠, 미주 언니.”
문가희가 더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를 본 진우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채 낫지도 않았는데 왜 병원에 있지 않고 나왔어?”
여미주는 갑자기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알고 보니 그가 아끼는 문가희가 힘들어할까 봐 애초에 본가에 데려갈 생각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비를 베푸는 척 여미주를 데리러 포레스트로 온 것이고.
‘진우진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고 착각했다니. 한심해서 원.’
진우진이 문가희에게 해주는 것처럼 필요한 모든 것을 세심하게 살피고 챙겨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었다.
문가희는 여미주의 차가운 얼굴을 못 본 척하고 진우진에게 말했다.
“오빠가 걱정해주니까 금방 낫는 거 있지? 오늘 오빠랑 언니가 본가에 온다는 소리를 할머니한테서 듣고 나도 함께하려고 왔지.”
세 사람이 본가 앞마당의 넓은 잔디밭을 나란히 걸었다.
여미주가 원래 진우진의 오른쪽에서 걷고 있었는데 걷다 보니 저도 모르게 진우진과 문가희의 가운데에 끼어들었다.
진우진은 그제야 그녀를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
“아까 하려던 얘기 계속해봐.”
여미주는 문가희를 힐끗 쳐다보았다. 문가희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진우진, 우리 이혼해.”
약속이라도 한 듯 세 사람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문가희의 두 눈에 기쁜 기색이 잠깐 스쳤지만 이내 걱정하는 척 타일렀다.
“언니, 이혼 소리는 함부로 꺼내면 안 돼요. 자주 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그 말을 하면서 진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여미주 역시 진우진을 보고 있었다.
진우진의 잘생긴 얼굴이 서서히 차가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그는 여미주를 쏘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미쳤네, 아주.”
그러고는 시선을 거두고 긴 다리를 오만하게 뻗으며 별장으로 걸어갔다.
“언니, 우진 오빠가 잘못을 해서 언니를 화나게 했다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대신 혼내줄게요. 이혼은 애들 장난이 아니에요. 심사숙고해야죠.”
문가희가 여미주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타이르자 여미주는 무표정하게 손을 빼버렸다.
“무슨 자격으로 내 남편을 대신 혼내주겠다는 거야?”
문가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여미주는 피식 웃고는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네 충고대로 이혼 안 할게. 그럼 이젠 언니 말고 새언니라 불러줄래?”
문가희는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다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여미주는 피식 웃고는 그녀를 지나쳐 별장으로 향했다.
점심 식사 분위기가 나름 화기애애했다.
진우진의 어머니 서연정과 할머니 최인선의 눈에는 온통 문가희뿐이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에 사랑이 가득했다.
서연정이 말했다.
“엄마가 특별히 주방에 일러서 인삼 닭백숙을 만들라고 했어. 넌 몸이 약해서 몸보신 많이 해야 해.”
문가희가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맛보더니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맛있어요. 고마워요, 엄마.”
최인선이 닭 다리를 집어주자 문가희가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요, 할머니.”
최인선이 입을 열었다.
“어제 또 병원에 갔다며? 더위 먹었어?”
“아니요. 그냥 오래된 지병이 다시 도졌어요.”
문가희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우진 오빠가 챙겨줘서 거의 다 나았어요.”
서연정과 최인선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우진아.”
서연정은 진우진더러 문가희에게도 반찬을 집어주라고 눈치를 줬다.
“혼자만 먹지 말고 좀 챙겨줘.”
여미주는 못 들은 척 고개를 푹 숙이고는 젓가락을 꽉 쥔 채 밥만 퍼먹었다.
문가희가 비록 진씨 가문의 족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명목상의 양녀였지만 가족들은 그녀를 끔찍이도 아꼈다.
반면 여미주는 서연정과 최인선의 눈에 속셈이 많은 여자일 뿐이었다.
진우진이 비행을 나가 본가에 오지 못할 때면 그녀는 식탁에 앉을 자격조차 없었다.
서연정은 여미주더러 서서 문가희에게 반찬을 집어주라고 시켰고 식사 후에는 가정부들과 함께 밥을 먹으라고 했다.
한참 생각에 잠긴 그때 은색 젓가락 하나가 그녀의 시선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진우진이 기름지지 않고 살코기가 적당히 붙은 수육 한 조각을 집어준 것이었다.
“고기 많이 먹어. 너 너무 말랐어.”
여미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기를 내려다봤다.
‘잘못 이해했나? 어머님은 분명 문가희한테 반찬을 집어주라는 뜻이었는데.’
식탁 위 나머지 세 사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문가희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수육을 먹을 수 있는 언니가 너무 부러워요. 난 이런 기름진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하거든요.”
여미주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
‘문가희가 먹지 못하는 걸 나한테 집어준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