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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진 기장님, 객실 문 닫았고 승객분들 착석 완료, 짐칸 잠김 확인 완료, 승무원 준비 완료했습니다. 이륙 허가받으시면 됩니다.” 이륙 15분 전, 진우진은 비행기 조종석에서 내부 인터폰을 통해 들려오는 여미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금 전 화장이 지워졌다면서 화를 내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지금 이 목소리는 한없이 상냥하고 지적이었다. 진우진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인터폰을 받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타워에서 이륙 허가를 받았고 토잉카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객실은 전자기기의 무선 신호를 차단해주길 바랍니다.” 여미주가 답했다. “알겠습니다.” 비행기가 성공적으로 이륙했고 약 한 시간 뒤 내선 인터폰이 다시 울렸다. “진 기장님, 객실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승객 한 분이 너무 춥다고 하셔서 에어컨을 25도로 올렸는데 기체 균형에 영향을 미칠까요?” 진우진이 침착하게 답했다. “영향 없어요. 객실 온도는 22도에서 26도 사이로 조절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양쪽의 두 부기장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몰래 웃었다. 육성민이 웃으며 말했다. “사무장님의 목소리가 정말 듣기 좋네요. 귀가 녹아내릴 것 같아요.” 다른 쪽의 양태식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속지 마세요. 생각보다 그렇게 상냥한 여자가 아니니까. 대학교 2학년 때 도도하고 까칠한 여신으로 아주 유명했어요.” 육성민이 물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차가워요? 남자친구한테도 그런대요? 그럼 너무 고루하고 재미없겠는데요?” 진우진은 그들의 말을 듣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루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그만 알고 있었다. 여미주가 밤에는 얼마나 매혹적인 여자인지. 겨울날의 얼음처럼 그의 손바닥 위에서 녹아내려 부드러운 물이 되곤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을 제외하고 낮에는 반항심이 강해 참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특히 요 며칠 더 말을 듣지 않았고 심지어 이혼 합의서까지 남기고 집을 나가버렸다. 진우진의 눈빛이 점점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육성민이 물었다. “기장님, 사무장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우진의 말투는 덤덤하기만 했다. “괜찮은 사람이죠.” 육성민과 양태식은 그를 조용히 관찰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잘못 짐작했나? 기장님이 사무장님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거야?’ 양태식이 진우진의 왼손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힐끗 보더니 웃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우리 기장님은 집에 아내분이 계시니 당연히 아내분이 최고시겠죠. 아무도 비교가 안 될 거예요.” 진우진은 동의한다는 듯 대답하지 않았다. 내선 인터폰이 연결된 상태였다. 여미주는 조종석에서 무슨 지시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대화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지석주가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항공부 동료들 중 상당수가 문가희가 진우진의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양태식이 말한 아내도 문가희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었다. 진우진은 반박하지 않았다. ‘역시 고루하고 재미없는, 잠자리 파트너일 뿐인 나는 진우진한테 아무것도 아니었어.’ 4시간 후 비행기가 라임 공항에 도착했다. “진 기장님, 이번 비행에 응급 의료 상황은 없었습니다. 이코노미석 후방에서 승객 한 분이 테이블이 흔들린다고 하셔서 비행일지에 기록해뒀습니다.”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내선 인터폰을 통해 들려온 순간 진우진은 멈칫하고 말았다. 감정을 숨긴 듯 여미주의 목소리가 한없이 차가웠다. 이 감정은 분명히 그를 향한 것이었다. 진우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 내선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알겠습니다. 이따가 정비팀에서 점검 진행할 겁니다. 이번 비행도 순조로웠어요. 수고하셨어요, 사무장님.” 마지막 한마디에 떠보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여미주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 “나중에 객실 보고서 제출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진우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젠 기장님이라고도 안 부르네?’ 인터폰이 완전히 끊겼다. 육성민은 싸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 “대박. 정말 도도하고 까칠한 여신이네요. 한마디 한마디에 얼음이 서려 있어서 상대를 얼어 죽게 만들 것 같아요.” 양태식도 말했다. “개성이 너무 강하네요. 대체 어떤 남자여야만 사무장님 같은 여자를 정복할 수 있을까요?” 진우진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졌다. 한 손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종석을 떠났다. ... 여미주는 휴게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번에 라임시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근무 시간이 최장 근무 시간에 다다랐기에 7월의 마지막 사흘은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했다. 8월이 돼야 다시 일을 할 수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 지하 주차장을 걷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지석주의 전화였다. “미주야, 이번 달 근무 끝났지?” “응.” “그럼 공항에서 좀 기다려. 지훈이랑 데리러 갈게.”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 택시 타면 돼.” “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와. 나 고기 구워 먹으려고 고기 배달시켰어. 저녁에 집에서 바비큐 해 먹자.” 여미주는 전화를 끊은 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이 층은 전부 개인 차량뿐이라 밖으로 나가야만 택시 잡기 더 편했다. 그런데 두 걸음도 옮기지 못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익숙하면서도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집 차가 바로 앞에 있는데 어디 가?” 여미주는 돌아서서 진우진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랑 이혼에 대해 얘기하려는 거라면 기꺼이 얘기할 용의가 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됐어. 저녁에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이만... 뭐 하는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우진이 허리를 숙여 여미주를 어깨에 메더니 한 손으로 발버둥 치는 다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끈 채 걸어갔다. “진우진, 당장 내려놓지 못해? 누가 보면 어쩌려고.” 진우진이 씩 웃었다. “계속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 지하 주차장 전체에 네 목소리가 메아리로 울려 퍼질걸?” “...” 머리가 아래로 내려간 자세라 가슴이 답답했다. 잠시 후 하늘이 빙글 돌았다. 진우진이 그녀를 벤틀리 뒷좌석에 밀어 넣은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은 뒤 운전석의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 “기사님, 포레스트로 가주세요.” “네, 도련님.” 벤틀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미주는 현기증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문을 열고 내리려 했다. 진우진은 그녀의 행동을 예측한 듯 허리를 잡고 다리 쪽으로 끌어당긴 다음 커다란 손으로 마구 움직이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버둥거린 나머지 손목이 너무 아팠다. 여미주가 버럭 화를 냈다. “미쳤어?” “가출한 아내를 집에 데려가겠다는데 뭐가 미쳤다는 거야?” 여미주가 또박또박 말했다. “가출이라니? 우린 지금 이혼하기 전에 별거하는 거라고.” 진우진은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아 무릎 위에 앉도록 했다. “여미주, 이혼은 연애하다 헤어지는 게 아니야. 그리고 네가 일방적으로 통보한다고 해서 혼인 관계가 끝나는 게 아니라고.” 여미주가 참을성 있게 말했다. “이혼 합의서에 난 이미 사인했어. 당신만 사인하면 시간 잡아서 법원...” 진우진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내가 찢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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