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앞자리에서 운전하던 서국헌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도련님을 욕했더라면 진작 죽었을 거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는데 홧김에 나까지 죽이는 건 아니겠지?’
서국헌은 뒷자리 칸막이를 올리고 싶었지만 갑자기 나는 소리가 진우진의 신경을 건드려 화살이 그에게로 돌려질까 봐 두려웠다. 숨도 크게 못 쉬었고 마음 같아서는 차 바닥에라도 숨고 싶었다.
겁에 질린 서국헌과 달리 진우진의 어두운 면을 한 번도 본 적 없음에도 여미주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을 빳빳이 세우고 또박또박 말했다.
“진우진, 당신 진짜...”
비겁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진우진이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독설을 내뱉는 붉은 입술에 거칠게 입을 맞췄다.
서국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칸막이를 올렸다.
뒷자리의 분위기가 금세 뜨거워졌다.
벌을 주듯 여미주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여미주는 숨이 막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주변 공기마저 희박해지는 것 같았다.
진우진은 그녀의 몸부림이 잦아든 걸 느끼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달콤한 맛을 보고서야 놓아준 다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3년 동안 득을 본 사람은 너지. 너한테서 득을 보려 했다면 매번 네 기분까지 고려해주지 않았어.”
“...”
여미주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아픈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그 점에 있어서 진우진은 정말로 그녀를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
진우진이 다시 한번 가볍게 입을 맞췄다.
“생리 전이라 예민한 거지? 한바탕 욕하고 나니까 기분 좀 나아졌어? 나아지지 않았다면 더 욕할래?”
“...”
여미주는 갑자기 눈가가 시렸다.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다.
‘그렇게 심하게 욕했는데 왜 화를 안 내? 차라리 따귀라도 때리지. 그러면 마음을 깨끗하게 접었을 텐데. 왜 이렇게 다정하게 달래는 건데?’
여미주는 이런 남자에게 제일 약했다. 사랑 발린 말을 참 능숙하게 잘하는 나쁜 남자에게 말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렸는데도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고 그 사탕을 한 입 베어 물면 뼈저리게 아플 독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목숨 걸고 한번 맛보고 싶었다.
문가희가 옆에 없을 때면 진우진은 정말 그녀에게 인내심도 많았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착하지? 화 풀어, 응?”
진우진은 거친 손가락 때문에 여미주의 부드러운 볼이 긁힐까 봐 휴지로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틈틈이 입도 맞추면서 아주 인내심 있게 달랬다.
여미주는 그의 무릎 위에 앉아 품에 기댄 채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가 문득 문가희의 생각이 나면 또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내려쳤다.
진우진은 화 한번 내지 않고 그 모든 걸 다 받아줬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울다 지친 여미주는 진우진의 품에 축 늘어졌다.
진우진은 그녀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기분이 안 좋을 땐 남편한테 풀어도 돼. 그런데 이혼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 마. 알았어?”
여미주가 눈물에 젖어 뭉친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바탕 울고 나니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이 인간한테 또 속으면 안 돼. 겉으로는 잘해주지만 뒤에서는 일전 한 푼 주지 않으려고 엄청 경계하고 있다고. 이혼 안 해주는 건 아직 나한테서 빼앗아가지 못한 게 있어서 그런 거야.’
여미주가 떠보듯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이혼해줄 건데?”
이번에는 진우진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는 걸 제대로 봤다. 기운이 조금 전보다 훨씬 차가워졌다.
“진짜 꼭 이혼해야겠어?”
부부 사이에서 잠자리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속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서 평생 같이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3년의 계약 결혼이 이제 두 달 남았다.
진씨 가문에서 여미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문가희는 여전히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고 진우진 역시 겉보기만큼 솔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우진의 눈빛이 음산해지더니 한참 후 피식 비웃었다. 자신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여미주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이혼해줄 수 있어. 대신 조건이 있어.”
여미주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역시 아직 뜯어낼 게 남아서 놓아주지 않았던 거였어.’
“뭔데?”
진우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내 아이를 낳아주면 이혼해줄게.”
여미주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미쳤어?”
진우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네가 날 건드린 대가야.”
여미주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혼하겠다는데 아이를 낳아달라니? 설마 문가희가 애를 못 낳나?’
생각할수록 이 결혼이 점점 섬뜩해졌다.
‘문가희가 아이를 못 가지니까 날 대를 잇기 위한 도구로 생각했던 거야?’
진우진이 한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 다 했어?”
여미주는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손이 다 떨렸다.
“절대 안 돼.”
그녀는 새 생명은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여미주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이혼하려고 진우진의 애를 낳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우진이 피식 웃더니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협상이 안 됐으니 평생 나한테서 못 벗어나.”
그러고는 넥타이를 풀고 여미주의 가느다란 손목을 순식간에 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유리창에 눌러버렸다.
여미주는 이 동작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진우진, 날 건드렸다간 가만 안 둬.”
그는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푼 다음 검은 셔츠를 벗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끝없이 재잘대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더는 참지 않았다.
“꼭 이혼해야 한다며? 네 소원 좀 더 빨리 들어주려고 그러는 건데.”
“나쁜 자식, 짐승만도 못한 놈아!”
여미주가 눈물을 쏟으며 욕했다.
진우진은 이마를 그녀에게 맞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음흉하게 웃었다.
“우리 자기 욕 엄청 잘하네.”
“...”
차가 포레스트 문 앞에 천천히 멈췄다.
벤틀리가 단방향 방탄유리인 데다가 칸막이까지 올라가 있어 보이지 않는 건 물론이고 방음도 잘 되었다.
서국헌은 차체가 흔들리는 걸 느끼고는 눈치 있게 차에서 내렸다.
“도련님 오셨어요?”
엔진 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곽희자를 본 서국헌이 황급히 말렸다.
“도련님 화가 많이 나셔서 지금 사모님을 혼내고 계시니까 가까이 가지 말아요. 괜히 불똥 튈 수 있어요. 물 좀 주실래요? 목이 너무 말라요.”
곽희자는 어떻게 혼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진우진이 여미주의 화만 내면 아주 고소해했다. 더는 다가가지 않고 신이 나서 물을 가지러 갔다.
...
한 시간 후 여미주는 욕하다가 목이 다 쉬었고 지친 나머지 잠들어버렸다.
진우진은 셔츠로 그녀의 몸을 감싸고는 상의를 헐벗은 채 그녀를 안고 내렸다.
어깨의 잇자국과 등의 손톱자국만 보면 진우진이 당한 쪽 같았다.
여미주가 눈을 떴을 땐 여전히 밤이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는데 진우진이 샤워 중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잠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고 몸에서 향기까지 났다. 진우진이 씻겨준 게 틀림없었다.
지금쯤 고기를 구우며 그녀를 기다릴 지석주와 임지훈이 떠올라 문자를 보냈다.
[미안해, 석주야. 나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집에 왔어. 다음에 두 사람한테 밥 살게.]
문자를 보낸 다음 침대 옆 서랍을 열어 하얀 약병을 꺼냈다. 그러고는 피임약 한 알을 꺼내 힘겹게 삼켰다.
이 결혼이 언젠가 끝날 거라는 걸 알았기에 처음부터 진우진의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몰래 뭘 혼자 먹어?”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우진이 어느샌가 욕실에서 나와 옆에 서 있었다.
그 소리에 여미주는 깜짝 놀라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툭.
약병이 손에서 떨어져 진우진의 발치에 멈췄다.
진우진은 씩 웃으면서 허리를 숙여 약병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