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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임도윤은 그날 창문을 뛰어내린 여자를 찾으라고 명지훈에게 지시했고, 명지훈은 곧장 브린드 호텔의 CCTV 영상을 뒤졌다. 조사 결과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날 저녁 7시와 9시, 정확히 두 구간의 영상이 통째로 공백이었다. 보안팀조차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고, 아마도 일시적으로 네트워크가 끊겼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명지훈은 노력 끝에 한 사람을 찾아냈다. 바로 신연미였다. 신연미는 청순한 이미지로 활동하는 무명 배우였다. 저녁 6시 50분 그녀가 브린드 호텔에 들어갔다가 연풍관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하지만 그 후 영상이 끊겼기 때문에 그녀가 정확히 어느 방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기록이 이어진 건 9시 5분. 그녀는 매니저에게 부축을 받으며 연풍관 로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다리 한쪽을 절뚝이는 모습을 보니 다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녀가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는 영상으로 알 수 없었다. 하여 명지훈은 결국 발로 뛰어 그녀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냈고, 어젯밤 왼쪽 다리 골절 수술을 받은 사실까지 확인했다. 수술 기록을 찾아보니 추락성 골절이었다. 그날 밤 강진대학병원 706호 VIP 병실,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신연미는 불안하게 두 손을 꽉 쥔 채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임도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표님,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다리는 어떻게 다친 거예요?” 임도윤이 그녀를 쳐다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신연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게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죠?” “숨길 필요 없어요. CCTV 영상 이미 확인했어요. 어젯밤 9시경, 매니저가 신연미 씨를 부축해 브린드 호텔에서 나갔잖아요. 그때 신연미 씨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어요. 내 방 창문에서 뛰어내린 사람 신연미 씨 맞죠?” 신연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매니저는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임도윤은 다리를 꼬며 덤덤히 말했다. “겁낼 필요 없어요. 내가 말했잖아요. 날 도와준 만큼 보상해주겠다고요.” 명지훈이 탁자 위에 카드를 내려놓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20억이에요. 대신 그날 밤의 일은 잊어버려요.” 신연미는 입술을 깨물고 오랫동안 침묵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돈은 필요 없어요. 그날 저도 원해서 한 거였으니까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나 약속은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에요. 돈이 싫다면 원하는 다른 걸 말해도 돼요.” 매니저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신연미는 주먹을 꼭 말아쥐고 조심스레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다만.. 만약 대표님께서 제가 마음에 드신다면 친구로 대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그의 냉랭한 목소리가 단호히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 생각엔 더 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신연미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소속사를 떠나고 싶어요. 방법이 있을까요?” 임도윤이 무심하게 되물었다. “그럼 임성 그룹 계열사 빅토리 엔터로 옮길래요?” 순간 매니저의 눈동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빅토리 엔터는 국내 최정상급 기획사로서 수많은 톱스타를 길러낸 곳이다. 그곳에만 들어가면 분명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다. 신연미는 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임 대표님.” “빅토리 엔터 허진욱에게 계약서 준비하라고 할게요. 지금 회사에게 지급할 위약금도 함께 정리해 줄 거예요.” 그녀는 감사 인사를 거듭했다. 여리여리한 목소리와 수술 때문에 창백해진 얼굴까지 더해지니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문득 임도윤이 돌아서며 한마디 던졌다. “그런데 어젯밤 내 방엔 왜 들어온 거예요?” 신연미는 잠시 당황했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옆방에서 촬영할 예정이었는데 방을 착각했어요.” ... 임도윤이 떠나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신연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물론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 부감독이 대본 상의를 핑계로 그녀를 브린드 호텔로 불러냈었다. 룸에 들어가는 도중 옆방엔 임도윤이 묶고 있다는 종업원의 말을 듣고 일부러 몇 번 쳐다보기도 했었다. 그녀가 방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다 되어가서야 술에 절어있던 부감독이 간신히 깨어났다. 영화는 무슨, 그저 부감독의 저급한 욕망만 득실거리는 자리였다. 그녀는 끝까지 거부하다 결국 눈을 질근 감고 창문 밑으로 몸을 던졌다. 임도윤이 오기 전 매니저는 한창 그녀를 혼내고 있던 중이었다. 연예계에서 뜨려면 그런 더러움 정도는 견뎌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매니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임 대표 잘못 짚은 거지? 속였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신연미가 창백한 얼굴로 이불을 말아쥐었다.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 돼지 같은 부감독이랑 자기라도 하라는 거예요?” 빅토리 엔터와의 계약은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그보다 더 강력한 건 단연 임도윤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임도윤은 강진 시를 넘어 전 C국의 경제까지 흔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정계부터 금융계까지, 임씨 가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의 곁에 설 수만 있다면 세상 누구도 그녀를 얕잡아보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 내린 이 절호의 기회를 왜 밀어내겠는가? 지금까지 그녀를 짓밟았던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당당히 설 수 있는데, 도박 한 번 해보는 게 뭐가 나쁘겠는가? 부감독 또한 무섭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가 뛰어내린 일로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더이상 그녀와 조금의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 했으니 말이다. 한편, 병원을 나선 임도윤은 어두운 얼굴로 차에 앉아 있었다. 무명 배우였다니. 얼굴이 예쁘장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불쾌하고 실망스러웠다. 이런 짜증스러운 감정 때문에 그녀가 5만 원으로 자신을 모욕한 사건조차 시시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저 빨리 정리하고 끝내고 싶었을 뿐. ...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친 후 서하영은 택시를 타고 친정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먹구름을 가득 안고 있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다. “아가씨, 오셨군요.” 서하영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발을 갈아 신었다. 사모님과 아가씨의 오래된 갈등 탓에 아주머니의 태도 또한 차갑고 무심했다. “언니 왔어?”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2층에서 들려왔다. 한 소녀가 해맑게 웃으며 내려와 서하영을 맞이했다. 서하영도 웃으며 인사했다. “도아야.” 그때, 아주머니가 나와 활짝 웃으며 서도아에게 디저트를 가져다주겠다고 말했다. 서도아는 언니와 얘기해야 한다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서도아는 막 손질한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했다. “언니, 나 미용실에서 자른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직접 잘라봤는데 그래도 영 별로야. 언니가 좀 다듬어 줄래?” 서하영은 한 번 슥 훑어보더니 동생이 건넨 가위를 받으며 물었다. “어디 말하는 거야?” “여기 귀밑에.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언니가 잘라줘.” 서도아가 머리를 기울여 귀 옆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서하영이 가위를 그녀의 얼굴 가까이 가져간 순간, 문 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하영! 지금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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