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여자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그대로 서하영의 몸에 내리치고 그녀를 거칠게 뒤로 밀쳐내고는 서둘러 서도아를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진원희는 눈에 핏발이 설 만큼 긴장한 채 딸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도아야, 어디 다친 데 없어? 피는 안 나? 아픈 데는?”
젖은 꽃잎이 바닥에 산산이 흩어졌다. 장미 가시에 스쳤는지 서하영은 목덜미에서 따끔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딸을 끌어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서진철이 빠르게 다가와 서하영에게 물었다.
“다친 데 없지?”
진원희는 고개를 돌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서하영을 노려보며 독하게 쏘아붙였다.
“너 도대체 뭘 하려던 거야? 설마 우리 도아 죽이려고 한 거야?”
그 눈동자에 담긴 증오와 혐오를 본 순간, 서하영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서도아가 다급히 엄마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엄마, 오해예요! 제가 언니한테 머리카락 잘라 달라고 부탁했어요. 언니는 절 해치려던 게 아니라고요!”
“그랬던 거구나.”
서진철은 곧바로 진원희를 나무랐다.
“당신은 왜 맨날 그렇게 성급해. 사실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화부터 내잖아. 봐, 하영이 옷까지 더럽혀진 거.”
진원희도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닫고는 애써 설명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영이가 도아 목에 가위를 들이대고 있는 걸 봤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됐어, 그만 좀 해.”
서진철은 진원희를 흘겨보다가 이번엔 서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언니 데리고 올라가서 옷 좀 갈아입혀. 옷이 엉망이잖아.”
“언니, 가자.”
서도아가 손을 내밀었지만, 서하영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묻은 꽃잎 몇 장을 털어냈다.
2층 방으로 들어가자 서도아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언니, 정말 미안해. 엄마가 딱 그때 들어올 줄은 몰랐어. 괜히 언니 다치게 했네.”
“네 잘못 아니야.”
서하영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서도아는 옷장 속에서 하얀색 티셔츠를 꺼내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
“새 거야. 이거로 갈아입어. 난 아래에서 기다릴게.”
“알았어.”
서도아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소파 위 옷을 쳐다보고 있는 서하영의 얼굴에 옅은 냉기가 스쳤다. 머리를 잘라 달다던 동생,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때 들이닥친 엄마...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복도에 나왔을 때,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어떻게 꽃다발로 하영이를 때릴 수가 있어!”
서하영이 발걸음을 늦추었다.
진원희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는 거 몰랐다니까! 도아 목에 가위를 들이대고 있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서진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태도가 문제라는 거 모르겠어? 하영이야말로 우리 친딸이라는 거 잊지 마!”
“나도 알아. 3년 전 하영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도 잘해주려고 노력했어. 근데 하영이가 나가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잖아.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그때 붙잡기라도 했어?”
서진철이 말했다.
“당신이 도아 예뻐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하영이는 태어나자마자 아기가 바뀌는 바람에 다른 집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자랐어. 이제라도 좀 신경 써주면 안 돼?”
진원희가 울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난 20년 동안 도아를 친딸처럼 사랑해주면서 키웠어. 갑자기 어떻게 바꿔?”
“당신 잘못도 있어. 대체 왜 부른 거야. 생일날 괜히 분위기 망치게.”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서하영은 조용히 가방에서 봄 신상 액세서리 상자를 꺼내 화분대 위에 올려놓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엄마한테 생일 망쳐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녀는 서도아에게 한 마디 남기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바깥에 나오니 언제부터 내렸는지 가랑비가 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서도아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주머니, 운전기사 불러서 언니 태워다 주라고 하세요.”
도우미는 달려와 창밖 내리는 비를 보고 눈동자를 뒤룩 굴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고, 안됐지만 기사님은 사모님 케이크 가지러 나가서 아직 안 돌아왔어요.”
“괜찮아요. 저한테 우산 하나만 줘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서하영이 말했다.
“네.”
도우미는 빠르게 달려가 우산을 꺼내 서하영에게 건네고는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십만 원짜리 우산이니까 조심해서 써요.”
서하영은 차가운 웃음을 짓고는 말없이 우산을 펼치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대문을 막 나선 순간, 멀리서 운전기사가 우산을 쓰고 걸어 다니는 모습이 서도아의 눈에 들어왔다.
도우미가 민망한 얼굴로 쭈뼛거리며 말했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기사님 30분 전에 돌아왔는데 깜빡했네요. 이런 날씨에 아가씨를 혼자 보내다니 미안해서 어쩌죠.”
서도아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주머니, 요즘 힘드신가 봐요. 엄마한테 월급 올려드리라고 말씀드릴게요.”
가사도우미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앞으로 뭐든 말씀만 하세요.”
서도아는 계단을 올라가다가 화분대 위에 올려진 액세서리 상자를 발견했다. 그때, 서진철과 진원희가 방에서 나왔다.
서하영이 갔다는 말에 진원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철도 생일날 아내와 다투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리려 서도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선물 상자를 가리키며 웃으며 물었다.
“이거 엄마 선물이야?”
진원희가 웃으며 다가와 상자를 열어보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환희가 피어올랐다.
“이거 GK 봄 신상이잖아! 아직 홍보 단계라 수량도 제한돼 있다던데 이런 걸 어떻게 구했어? 도아야, 이거 정말 엄마 주려고 네가 산 거야?”
서도아는 순간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엄마가 좋아하시면 됐어요.”
“내 딸, 정말 최고야!”
진원희는 감격에 차올라 서도아를 끌어안았다. 조금 전 서하영에게 느꼈던 죄책감 따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편, 서하영은 비 내리는 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긴 별장 구역이라 대중교통도 없었고 택시도 잡기 힘들었다.
가랑비는 봄의 냉기를 고스란히 실어 나르며 그녀의 마음까지 시리게 적셨다.
그때,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소녀가 창밖을 보더니 뒤쪽 남자에게 말했다.
“삼촌, 제 친구예요. 여긴 버스도 없으니까 우리 태워줘요.”
승낙을 받은 뒤 운전기사가 차를 후진했다. 소녀는 창문을 내리고 서하영을 향해 소리쳤다.
“서하영! 얼른 타!”
서하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임주미?”
두 사람은 같은 과 학생이었지만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
임주미가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어서 타. 일단 차에 타고 얘기해.”
“고마워.”
서하영은 짧게 숨을 고르곤 우산을 접고 차에 올랐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본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