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임도윤은 고개조차 들지 않고 손에 든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너무나 고고하고 냉담해 마치 범접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 같았다.
임주미가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하영, 너 여기 과외하러 온 거야?”
그녀는 서하영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여 부촌인 여기엔 당연히 과외를 하러 온 거라고 생각했다.
서하영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운 좋게 널 만났네.”
잠시 잊고 있었다. 임주미는 임도윤 큰형의 딸, 그의 조카라는 사실을.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사람을 불과 일주일 사이에 세 번이나 만나게 되었다. 서하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동안 잠들어 있던 사랑의 여신이 이제야 깨어나기라도 했나.
임주미는 기분 좋게 임도윤을 소개했다.
“이분은 우리 둘째 삼촌이셔!”
서하영은 모르는 척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낯익은 듯한 목소리에 임도윤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으나 곧 가늘게 좁혀졌다.
서하영은 우산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은 이미 폭풍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가 아는 거라곤 자신이 강진대 학생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괜히 당황할 필요는 없다.
임주미는 원래부터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라 자연스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주민정 요즘 지선우 따라다니는 거 맞지?”
어제 일이 떠오른 서하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런 것 같아.”
임주미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지선우가 3년 동안 너 좋아했다는 거 전교생이 다 아는 사실이잖아. 지선우가 주민정 같은 애한테 관심 가질 리가 없지.”
서하영은 무심코 임도윤을 흘깃 보고는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나랑 지선우는 그냥 친구일 뿐이야. 지선우가 누구를 만나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임주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하영은 속으로 억울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계약 결혼이긴 하지만 엄연히 한 남자의 아내인 몸이다.
도심에 도착할 무렵, 앞에서 사고가 나 교통이 막혀버렸다. 임주미는 배를 끌어안고 불평했다.
“이거 언제 뚫릴지 모르겠네요. 저 배고파 죽겠어요. 우리 먼저 밥 먹으러 가면 안 돼요?”
서하영이 곧바로 말했다.
“난 여기서 내릴게. 혼자 학교에 돌아가면 돼.”
“무슨 학교야. 점심시간이잖아.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임주미는 그녀의 의견 따윈 묻지도 않고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임도윤이 시계를 한 번 보고는 명지훈에게 지시했다.
“차 세워.”
마침 오른편에 프랑스 레스토랑이 보였다.
세 사람은 그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임주미는 혹여 서하영이 이런 고급 레스토랑은 처음인가 싶어, 간단히 그녀의 입맛을 물은 뒤 대신 주문까지 해주었다.
임주미가 주문을 마치고 화장실로 가자 임도윤과 서하영만 덩그러니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는 소파에 느긋이 기대앉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섬세하고 준수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서하영의 머릿속에 또다시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는 그 누구보다 거칠고 강렬했다. 지금의 고고한 자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날 그녀는 집에 돌아온 뒤 한참을 후회했다. 이유도 모르고 순결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왜 돈까지 내놓고 왔단 말인가! 너무 화가 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수려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있으니 5만 원이 아깝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듯 임도윤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서하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지만, 귓불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낮부터 이 무슨 망측한 상상이란 말인가!
임도윤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예요?”
서하영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남자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답했다.
“서하영이에요.”
남자의 준수한 얼굴에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인 게 분명했다.
서하영은 속으로 쓸쓸히 중얼거렸다.
‘역시 결혼 상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마침 웨이터가 디저트를 가져오고 동시에 서하영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해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성희연이 보내온 카톡 문자였다.
[하영아, 내가 누구 봤는지 알아? 임도윤! 어떤 여자랑 밥 먹고 있더라. 등지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어. 세상에, 귀국하자마자 여우 같은 여자랑 데이트라니. 자기가 결혼했다는 거 잊은 거 아냐?]
서하영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손가락을 움직였다.
[미안. 그 여우가 바로 나야.]
성희연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녀와 임도윤의 결혼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 서진철을 제외하면 성희연 단 한 명뿐이었다.
성희연이 충격에 빠진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문자도 곧바로 이어졌다.
[네가 왜 임도윤과 같이 있어? 너희 부부 드디어 만나기로 한 거야?]
서하영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고개를 들고 남자를 한 번 쳐다본 뒤에야 성희연에게 답장했다.
[아니. 그냥 우연히 만난 거야. 자세한 건 돌아가서 얘기할게.】
하지만 성희연의 흥분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나 지금 3층이야! 바로 내려갈게!]
서하영은 번개처럼 빠르게 타이핑했다.
[거기 있어, 움직이지 마!]
성희연이 서운한 이모티콘을 보내왔지만 서하영은 더는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청아한 향수 냄새가 코안을 파고들었다.
GK 봄 신상 베이지 슈트를 차려입은 여자가 걸어와 곧장 임도윤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정교한 외모에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서하영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임도윤에게 말했다.
“아침에 내가 점심 같이 하자고 전화했을 땐 바쁘다더니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었던 거네요.”
임도윤이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선약이 중요하죠.”
서하영을 쳐다보는 여자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안녕하세요. 전 한소윤이라고 해요. 아가씨 성함은?”
서하영이 여자의 적의를 알아차리고 대답하려는 순간, 임도윤이 돌연 그녀 앞에 디저트를 밀어주었다. 그가 여전히 냉담하지만 친밀함이 스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티라미수 좋아하잖아요. 먹어요.”
서하영은 티라미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순순히 포크를 들었다.
한소윤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뭘 그렇게 감싸요. 단지 이름을 묻는 것뿐인데,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요?”
임도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겁 많고 낯가림도 심한 사람이에요.”
서하영은 티라미수를 한 술 입에 넣고 간신히 삼켜냈다.
한소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겁이 많다고요? 요즘 아가씨들 엄청 대담하던데... 얼굴만 믿고 남자 꼬시러 다니는 여자가 수두룩해요. 도윤 씨도 조심해요.”
임도윤은 다리를 꼬고 앉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덤덤히 말했다.
“예쁘면 됐죠 뭐. 난 더 바라는 거 없어요.”
숟가락을 쥔 서하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케이크도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소윤의 얼굴이 선명하게 일그러졌다. 남자는 이 여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질투하거나 화를 낼 자격은 없었다. 두 집안 사이가 막역해 아버지가 혼사를 밀어붙이고 있긴 하지만 임도윤은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일수록 품위를 지켜야 했기에, 그녀는 일어서 우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방해하지 않을게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조만간 어머님 뵈러 집에 갈게요.”
“그래요.”
임도윤이 짧고 냉담하게 한 마디 대답했다. 그녀는 씁쓸함을 애써 억누르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레스토랑을 나섰다.
서하영은 접시 위 디저트를 반쯤 먹은 상태였다. 여자가 자리를 뜨자 곧바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임도윤이 고개를 들고 담담히 말했다.
“방금 말 오해하지 말아요.”
예전의 거리감을 되찾은 목소리였다.
서하영도 태연히 맞받았다.
“알아요. 한 끼 얻어먹고 한 번 도와드렸으니 우리 이제 비긴 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