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임도윤의 깊은 눈동자에 미묘한 놀라움이 스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서하영을 몇 번 더 쳐다보았다.
곧이어 메인 요리가 올라오고 세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임주미가 가끔 학교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풀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비도 그치고 길도 다시 뚫렸다. 명지훈이 차를 몰고 오자 세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임주미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영아, 너 어디서 내릴 거야?”
“가는 길이면 학교 정문 앞에서 내려줘.”
서하영이 대답했다.
“알았어. 우리 둘째 삼촌 엄청 좋은 사람이야.”
임주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부부가 같은 차를 타고 있는 지금, 미묘한 긴장감이 그녀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차가 정문 앞에 멈추자 서하영은 임주미와 작별 인사를 했다.
“주미야, 고마워.”
“고맙긴 뭘. 다음에 커피 한 잔 사주면 돼!”
임주미가 장난스럽고도 귀엽게 웃어 보였다.
서하영은 우산과 가방을 챙겨 들고 말했다.
“임 대표님, 감사합니다.”
임도윤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낮게 “네.” 한마디만 내뱉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며 임주미에게 인사했다.
차가 출발하자 서하영은 홀로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 안,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임주미가 몸을 돌려 말했다.
“삼촌, 주현이 가정교사로 하영이를 부르는 게 어떨까요?”
임도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문 선생님들도 많은데 왜 굳이 학생을 써?”
“선생님들은 주현이를 감당 못 해요! 더욱이 서하영 불쌍하잖아요. 학비 벌려고 가정교사까지 하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어요.”
임도윤은 아직 졸업도 하지 못한 학생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도와주고 싶으면 그냥 돈 주면 되잖아.”
“사람마다 자존심이 있잖아요.”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삼촌, 허락해 주세요. 그냥 한 번 시켜보면 되잖아요. 주현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영이 스스로 그만둘 거예요.”
임도윤이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주현이를 길들일 수 있다면, 그 능력 인정해주지.’
“마음대로 해.”
임주미는 잔뜩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바로 전화할게요!”
별장에 도착하자 콩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서하영에게 애교를 부렸다.
콩이는 사모예드였는데 임도윤의 강아지였다. 서하영은 콩이가 태어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별장에 들어와 3살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정성껏 키워왔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기분이었다.
별장엔 도우미 아주머니 오진숙, 집사 곽철수, 서하영, 그리고 콩이가 한 가족처럼 3년 가까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잠시 콩이와 놀아주고 난 뒤 그녀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오자마자 임주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의 집에 와서 동생의 가정교사를 맡아달라는 통화내용이었다.
‘임씨 집안에 들어가 과외를 하라고?’
서하영은 상상만 해도 아찔해 단번에 거절했다.
“난 전문 과외 선생님이 아니라서 괜히 아이 공부 망칠까 걱정돼. 다른 사람 찾아봐.”
“모셨던 과외 선생님이 벌써 한 트럭이야! 주현이가 다 싫다고 내보냈어. 하영아, 나 좀 도와줘. 엄마 아빠는 집에 안 계시고 삼촌은 너무 바빠. 나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
서하영은 임주미와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좋았어! 내일 일요일 아침에 와. 집에서 기다릴게!”
임주미는 서하영이 또 거절할까 봐 다급히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서하영은 황당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콩이가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의 잠옷을 물어뜯자, 그녀는 콩이를 끌어안고 웃으며 말했다.
“내일 네 주인님 만나러 가. 혹시 전할 말 있어?”
콩이는 텅 빈 눈동자로 막연히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강아지의 큰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지주 집 바보 아들 같으니라고.”
...
그날 밤, 전화로 그녀가 임도윤의 조카 과외를 맡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성희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
“하영아, 이건 기회야! 너 이제 당당히 임도윤 집에 드나들 명분이 생겼다고! 들어가서 임도윤 꼬시고 결혼 계약 끝나기 전에 자빠뜨려! 그리고나서 이혼 서류를 그놈 얼굴에 뿌리는 거야. 생각만 해도 너무 멋있잖아!”
서하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만 더 들으면, 정말 그녀의 위험한 말에 세뇌될 것만 같았다.
다만 확실히 제대로 고민해 봐야 한다. 앞으로 임도윤과 마주칠 일이 잦아질 텐데, 어떤 태도로 그를 대해야 할까?
...
다음날 8시 50분, 서하영은 강진대 문 앞에 도착했다. 5분 정도 기다렸을 때 검은색 벤츠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이어 운전기사가 차에 내려 정중히 물었다.
“서하영 씨 되십니까?”
서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전기사의 태도는 더욱 공손해졌다.
“아가씨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서하영은 인사를 한 뒤 차에 올라탔다.
임씨 가문 본가는 성남에 있었는데 검은색 담장 가득 덩굴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담장을 따라 십여 분을 더 달려서야 마침내 웅장한 대문 앞에 도착했다. 검은색 철문이 열리고 안에 들어가니 단독주택과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문 앞에 서 있던 도우미가 문을 열고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서하영이 신발을 갈아신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튀어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있을 때 마침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가 보였다. 그녀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남자의 몸에 뛰어 올라가 그의 목을 감쌌다.
그녀는 콩이를 제외한 이 세상 모든 강아지를 무서워했다!
“코코!”
남자의 경고 섞인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진하던 검은 강아지는 임도윤의 발밑에 멈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임도윤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몸에 매달려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안 내려오면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예요!”
서하영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귓불 뒤 흉터에 닿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많이 옅어졌지만, 이렇듯 귀한 도련님 몸엔 어울리지 않는 상처였다.
임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떼어내려 팔을 들어 올렸다.
서하영은 한발 앞서 그의 어깨를 꼭 잡고 낮게 속삭였다.
“먼저 쟤한테 가라고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