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임도윤의 시선이 그녀의 앳되고 맑은 얼굴에 닿았다. 귓불에서 번져 나온 붉은 홍조는 마치 새벽하늘 구름 사이로 스며든 햇살 같았다. 대학생이라기보단 고등학생에 더 가까운 동안 외모였다.
그녀의 여린 기색에 묘한 연민이 일었는지, 임도윤은 몸에서 뿜어내던 싸늘한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코코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하고는 담담히 말했다.
“이제 내려와요.”
서하영은 뒤를 흘깃 돌아보고는 태연한 척 손을 풀고 툭 뛰어내렸다. 그러나 땅에 발이 닿자마자 재빨리 남자의 뒤로 숨어들어 그 무서운 개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남자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코코 곁으로 걸어갔다.
서하영은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전 너무 가까이 밀착돼 있었던 탓에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그의 체취를 맡았다. 이른 봄 산비탈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차갑고 맑은 샘물 같은 상쾌한 냄새였다. 그 끝에는 연한 나무 잔향이 맴돌기도 했다.
임도윤은 코코 곁에 쪼그리고 앉아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코코는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아요.”
서하영은 그 말이 좋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
자세히 보니 코코는 순종 혈통의 독일 셰퍼드였다. 보통 셰퍼드보다 체격이 훨씬 크고 위압적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다.
서하영은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
“익숙하게 듣던 말이네요. 길 가던 사람이 개에게 물려 다쳤다는 뉴스에서요.”
임도윤이 눈동자를 번뜩이더니 냉담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젊은 분이 제법 입은 날카롭네요.”
서하영이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임주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뛰어 내려왔다.
“서하영, 왔구나!”
정교하게 화장한 임주미는 열정적으로 서하영을 맞이하고는 또다시 남자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우리 집엔 부모님이 안 계셔서 늘 조용해. 이분은 내 둘째 삼촌이야. 어제 봤지? 너도 그냥 삼촌이라 부르면 돼.”
서하영은 억지로 파리라도 삼킨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임도윤을 보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임도윤은 방금 전 그녀의 반항적인 말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어른을 봤는데 인사도 안 해요? 그 정도 예의도 없는 사람이 과연 가정교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네요.”
임주미는 삼촌이 왜 이렇게 서하영을 괴롭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임도윤을 향해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서하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억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
“삼... 촌.”
임도윤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코를 데리고 소파에 앉았다.
그 거만한 태도에 서하영은 그가 과거 강진 시 악명 높은 건달이었다는 소문을 믿고 싶어졌다.
“주현이는 위층에 있어. 내가 데려다줄게.”
임주미가 웃으며 말했다.
계단을 오르던 중, 임주미는 서하영에게 사과했다.
“하영아, 미안해. 첫날부터 난감했지? 네가 아직 우리 둘째 삼촌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 가족을 엄청 아끼는 사람이야. 오늘 네가 삼촌이라고 불렀으니, 앞으로 뭔가 필요하면 반드시 도와줄 거야.”
‘나는 그럴 일 없을걸.’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서하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고마워, 주미야.”
“고맙긴. 우리 학교에서 교류는 별로 없었지만, 나 사실 쭉 너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친구가 되고 싶었고.”
서하영의 미소가 조금 더 따스해졌다.
“우린 이미 친구잖아.”
임주현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 임주미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주현아, 나 들어간다!”
안에서 아무 대답이 없자 임주미는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열 살 남짓한 소년이 소파 한쪽에 기대앉아 태블릿을 끌어안고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온 걸 알면서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임주현, 새로 오신 네 과외 선생님이야. 내 동창이니까 괴롭히면 안 돼.”
임주미는 일부러 엄숙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제야 소년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들어 힐끗 보고는 시답잖게 “어.” 하고 대답한 뒤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임주미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누르고는 행여 서하영이 안 하겠다고 할까 봐 황급히 말했다.
“내 동생이 좀 까다로워. 제발 포기하지 말아줘!”
“걱정하지 마.”
서하영이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임주미는 서하영의 손을 잡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뒤 조용히 임도윤의 연락처를 넘겨주고는 낮게 속삭였다.
“난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 주현이가 괴롭히면 바로 우리 삼촌한테 연락해!”
서하영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임주현한테 맞아 쫓겨나는 한이 있어도 나서줄 사람이 아니야.’
임주미가 떠난 후, 서하영은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책상 앞에 가보니 숙제가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소년 곁으로 다가가 담담히 물었다.
“숙제는 안 하고 심통만 부리는 건, 부모님의 관심을 끌고 싶은 거니?”
소년이 순간 게임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또래보다 훨씬 사나운 눈빛이었다.
“참견하지 말아요. 아니면 하루도 못 버티게 해줄 테니까.”
그러나 서하영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부모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반항하는 건 철없는 아이나 하는 유치한 짓이야.”
소년은 태블릿을 꼭 움켜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영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게임이 그렇게 좋아? 숙제 다 하면 같이 해줄게.”
소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은 유치한 짓이라고 비웃더니, 이제는 어르고 달래기로 한 거예요? 어른들은 왜 항상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지 모르겠네요.”
서하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어른이래? 나도 아직 애거든!”
그녀의 진지한 얼굴을 본 임주현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서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됐어. 난 역시 안 되겠네. 이왕 온 거 그냥 너랑 게임이나 한 판 하고 가야겠어.”
임주현은 의심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게임을 켜놓고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담담히 말했다.
“정말이야. 애초에 널 가르칠 생각도 없었어. 네 누나가 날 불쌍히 여겨 억지로 떠맡긴 거니까.”
소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뭐가 불쌍한데요?”
서하영의 목소리가 한 단계 낮아졌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안 계셔서 할아버지가 나무 깎아 번 돈으로 날 키우셨어. 하지만 며칠 전 병 때문에 앓아누우셨어. 그래서 난 돈을 벌어야 해.”
서하영의 목이 점점 메어갔다.
임주현은 굳은 얼굴로 잠시 망설이더니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저한테 과외를 해주면, 돈 벌어서 할아버지 병 고칠 수 있는 거예요?”
‘됐다!’
서하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임주현은 부모님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더 큰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니 할아버지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이는 건 당연했다.
그녀는 촉촉한 눈동자를 내리뜨리며 일부러 슬픔을 감추듯 덤덤히 말했다.
“맞아. 너희 집에서 다른 집보다 과외비를 더 많이 주거든. 그만큼 빨리 할아버지 치료를 도울 수 있어.”
소년은 눈동자를 굴리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난처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과외해요. 할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 받아주는 거예요.”
서하영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할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슨 체면을 생각해 준다는 건지!
그녀는 여전히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날 받아주는 것만으론 아무 소용없어. 네가 숙제 열심히 하면서 나한테 협조해 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네 삼촌이 바로 나 내쫓을걸.”
“정말 귀찮네요.”
임주현이 태블릿을 내려놓고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빨리 할게요. 숙제 끝나면 게임 같이 하기로 한 거 잊지 말아요!”
“당연하지!”
서하영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래층에 한 시간가량 앉아 있던 임도윤은 무심코 위층 임주현의 방을 지나가다가 서하영이 과연 잘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문이 반쯤 열려 있는 방 안에서 요란한 서하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죽을 것 같아! 어디 있어! 빨리 나 구하러 와!”
이어 소년의 성난 외침이 들려왔다.
“이런 바보! 왜 거기서 폭탄을 터뜨려요! 그거 저라고요!”
“뭐야?”
임도윤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침 고개를 들고 있던 서하영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직도 게임 속에 빠져 있는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남자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