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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결국 마지못해 다가가 물병을 집어 들고 탕비실에 물 뜨러 갔다. 최주원이 코트를 벗어 소파에 걸쳐두더니 돌아서는 그녀를 발견하고 앞을 가로막았다. 입안이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스러운데, 쓸데없는 말씨름을 하느라 목까지 타들어 가니 가슴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제 물도 마시지 말라는 거예요? 나 병실 옮겨줘요. 이번엔 내 돈 낼 테니까!” 최주원은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병원 수돗물은 몸에 안 좋아. 설치된 정수기도 깨끗하다는 보장 없고. 차에 생수 있으니까 가져오라고 시켰어. 금방 올 거야.” 손아윤은 심장이 좋지 않아 어릴 적부터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당시 VIP 병실에서 마시던 물은 늘 은은하게 단맛이 도는 고급 생수였다. 그녀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탕비실을 살피며 대꾸했다. “저기 정수기 안 보여요? 생수통도 꽂혀 있고.” “브랜드도 모르는 싸구려야.” 최주원은 그녀의 손에서 물병을 강제로 뺏어 들더니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거짓말!” 손아윤은 오기가 생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VIP 병실에 싸구려 생수를 비치해두는 병원은 본 적이 없어요.” 최주원은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그녀를 데리고 직접 탕비실에 가서 확인시켜 줄 기세였다. “생수 가져왔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최주원의 오른팔 격인 경호원 두 명이 생수 두 박스와 새 물병, 그리고 보온병을 양손에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일단 식탁 위에 두세요.” 최주원이 식탁을 가리켰다. 경호원들이 물건을 내려놓고 병실을 나갔다. 손아윤은 휠체어를 끌고 다가갔다. 박스는 이미 뜯겨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생수병 하나를 집어 뚜껑을 따고 막 마시려던 찰나, 최주원이 성큼성큼 다가와 확 낚아챘다. 손아윤은 어안이 벙벙했다. 곁눈질로 박스에 찍힌 로고를 확인하자 서로 다른 두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최지유도 평소 마시는 물에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다. 따뜻한 물을 마실 때도 온도가 딱 적당해야지, 조금만 차갑거나 뜨거워도 몸에 좋지 않다며 유난을 떨곤 했다. 방금 그녀가 집어 든 생수는 평소 최지유가 즐겨 마시는 브랜드였다. 손아윤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 주려고 가져온 것도 아니면서 병실엔 왜 들여왔대?” 고작 생수 한 병 가지고 저렇게 예민하게 굴다니. 손등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보니 왼쪽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가죽이 쓸려 벗겨져 있었다. 이게 바로 통증의 근원이었다. “윽.” 같은 손이 연달아 다치고 나니,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한계에 다다랐다. 결혼식 날이 가족의 기일이 되어버리고, 이 세상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러움을 감추려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헉!” 순간, 심장에서 극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사지가 서서히 굳어가더니 호흡마저 점점 가빠졌다. 시야는 흐릿해졌고, 날카로운 이명이 외부의 소란스러움을 차단했다. 등 뒤에서 최주원은 생수병의 물을 컵에 따르며 말했다. “박스가 미리 뜯겨 있어서 뚜껑에 먼지가 묻었을지도...” 뒤돌아서 컵을 건네려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쨍그랑. 손에 든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윤아!” “여기! 의사 좀 불러주세요.” 최주원이 그녀를 안아 침대로 옮겼다. 잠시 후, 주치의 계승우가 의료진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서는 검사를 마치고 즉시 지시했다. “빨리 수술실로 이동하세요!” 최주원은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는 손아윤을 보며 절박하게 물었다. “분명 심장 상태가 안정됐다고 하지 않았나요?” “한동안 수치가 괜찮았던 건 맞아요. 하지만 안정기였다는 뜻이지, 완치됐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계승우는 콧등 위의 안경을 고쳐 쓰며 간곡히 부탁했다. “사모님은 감정 기복이 심하면 안 됩니다. 아니면 병세가 언제든 재발할 수 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최주원이 반박했지만 말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이때, 간호사가 달려와 재촉했다. “선생님, 백 선생님께서 환자분 카테터 절제술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또 수술이라니? 최주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수술하고 나면 골수 기증에는 지장이 없나요?” 옆에 있던 간호사가 그 말을 듣고는 입을 쩍 벌렸다. 계승우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직업 정신을 발휘해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그건 사모님의 회복 상태에 따랐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간호사를 따라 서둘러 수술실로 들어갔다. 최주원은 밖에서 수술실 표시등만 응시했다. 3시간 뒤 불이 꺼지고 손아윤이 실려 나오자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상태가 어떻습니까?” 계승우가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수술은 아주 성공적입니다. 별일 없다면 내일부터 일상적인 활동이 가능하겠지만, 일주일 동안은 격렬한 운동을 피해야 합니다. 특히 다시는 자극받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의사가 떠난 후 최주원은 병실로 향했다. 간호사는 그를 보자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환자분은 안정이 필요하니 보호자께서는 너무 오래 머물지 마세요.” “네.” 최주원의 대답을 뒤로하고 간호사는 의료 카트를 밀며 나갔다. 띠, 띠, 띠. 옆에 놓인 심전도 모니터의 수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에 방 안의 커튼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최주원은 앞으로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 병상 위, 산소호흡기를 쓴 손아윤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링거 바늘을 꽂은 손이 이불 밖으로 나오자 그는 조심스레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엄지와 검지 사이가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약은 바른 상태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심 좀 하지...” 이내 손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잘 여며준 뒤,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어둡게 조절하고 나서야 병실을 나섰다. 어둠이 내린 복도 끝.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통해 남자의 몸을 비췄다. 창문 틈새로 새어든 밤바람에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 끝에서 담뱃재가 흩날리며 불꽃이 연신 깜빡거렸다. 통화를 마친 경호원이 다가와 보고했다. “대표님, 장은심 씨가 전하길 최지유 씨께서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출장 일정이 없는 한, 그는 매일 최지유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최주원은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신 뒤 옆에 있는 재떨이에 비벼 끄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아내가 수술받은 건 지유가 눈치채지 못하게 입 조심해요.”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구겨진 옷을 매만지고 경호원이 건네준 코트를 받아 입고 위층으로 향했다. 병실 안. 장은심이 간곡한 태도로 설득하고 있었다. “아가씨, 우선 요기라도 좀 하세요. 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생겨서 늦으시나 봐요.” “싫어요. 주원 오빠는 늦어도 8시엔 꼭 나랑 저녁 먹으러 올 거예요. 이제 겨우 7시 넘었는데, 아직 일러요.” 최지유는 침대맡에 기댄 채 입구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온 신경은 문밖에 집중해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주원 오빠!” 그가 다가오기도 전에 최지유는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태블릿을 치워버렸다. 화면 속 드라마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였다.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 가장 먼저 최주원의 눈에 띈 건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겨진 저녁 식사였다. “왜 또 제때 저녁을 안 먹은 거야?” “오빠 기다렸죠. 지난번에 석 달 동안 출장 갔을 때도 내내 혼자 먹었단 말이에요. 모처럼 돌아왔는데 당연히 같이 먹어야죠.” 최지유가 이불을 걷어내고 내려오려 하자, 장은심이 얼른 휠체어를 가지러 갔다. 이때, 최주원이 손을 들어 제지하더니 다가가 그녀를 직접 안아 올렸다. 최지유는 그의 품에 폭 안겼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은하고 싱그러운 과일 향이 코끝을 스쳤다. “무슨 냄새지? 향 진짜 좋네요.” 향이라니? 최주원은 그녀를 식탁 앞에 앉혀주고는 옷깃 냄새를 살짝 맡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은은한 과일 향이 배어 있었다. 오늘 과일을 먹은 적이 없으니 아마도 손아윤에게서 옮겨온 모양이었다. “나 몰래 맛있는 거라도 먹고 왔어요?” 최지유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추궁했다. 꼬르륵. 때마침 최주원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이걸로 증명됐나?” 최지유는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럼 얼른 밥 먹어요.” 최주원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벌리려던 찰나, 본가 집사가 초조한 기색으로 달려왔다. “도련님, 병원에서...”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문밖에 선 집사를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무언의 경고를 보냈다. 집사는 입을 꾹 다물고 문 앞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먼저 먹고 있어. 잠깐 나갔다 올게.” “오빠...” 최지유는 아쉬운 듯 그를 붙잡았다. “설마 그냥 가버리는 건 아니죠?” “바로 앞에 있을 거야. 멀리 안 가.” 최주원은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고는 병실 밖으로 나왔다. “저쪽 가서 얘기해.” 비상구 쪽으로 따라간 집사가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최주원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무슨 일인데 병원까지 찾아와?” 집사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병원에서 연락받았습니다. 도련님께서 하준 도련님의 주사제를 끊으라고 지시하셨다던데... 정말입니까?” “그래, 맞아. 무슨 문제라도 있나?” 최주원은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뿌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준 도련님은 영영 회복하지 못할 겁니다.” 집사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목소리가 메어왔다. 최주원은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식물인간이 된 사람한테 비싼 약을 써봤자 병원 배만 불려주는 꼴이지. 주사제만 끊었을 뿐, 산소호흡기를 뗀 건 아니지 않나. 사고사가 아닌 이상 회복될 운명이라면 자연히 깨어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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