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손아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수술 다음 날이었다.
수액병이 바닥을 보일 때쯤 간호사가 다가와 바늘을 뽑아주려 했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는 순간,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병상 위로 툭 떨어졌다.
웅.
단톡방 채팅창이 화면 위로 떠 올랐다.
[그거 들었어? 최주원이 자기 삼촌 약을 끊어버렸대.]
[세상에! 재벌가 권력 싸움은 진짜 혈육이고 뭐고 없나 봐.]
바늘을 뽑자마자 간호사는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손아윤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최명철 회장의 막내아들, 최하준 씨도 이 병원에 입원해 있나요?”
방금 단톡방 내용을 봤다는 걸 눈치챈 간호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느 병원인지 아세요?”
“아, 실은...”
“크흠.”
가벼운 기침 소리가 간호사의 말을 끊었다.
손아윤의 주치의 계승우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백 선생 쪽에 일손이 좀 부족하다더군요.”
주치의의 눈짓을 알아차린 간호사는 수거한 수액병을 카트에 싣고 병실을 나갔다.
계승우는 청진기를 꺼내 검사를 시작했다.
“아직도 숨쉬기 답답한 증상이 있으신가요?”
그날 극심한 심적 고통으로 심장이 갑자기 수축하면서 마치 숨통이 조여드는 듯한 호흡 곤란도 겪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검사를 마치고 그는 차트에 무언가를 빠르게 기록한 뒤 의료진을 데리고 나갔다.
병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손아윤의 마음은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최하준은 이미 식물인간 상태라 약까지 끊기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최강 그룹도 이미 손에 넣었겠다, 왜 최하준까지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거지?”
한창 생각에 빠진 와중에 밖에서 누군가 자신의 병실을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씀 좀 여쭐게요, 손아윤 환자 병실이 여기가 맞나요?”
“환자분과는 어떤 관계시죠?”
“아윤이 이모예요.”
손아윤은 목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안내 데스크 앞에 검은색 패딩을 입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간호사는 방문객 명단과 펜을 들고 기록할 준비를 했다.
“아주머니.”
“아가씨!”
양순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한껏 격앙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가녀린 팔을 붙잡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고,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요? 대표님께서 제대로 안 챙겨주세요?”
손아윤은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회피하며 물었다.
“등포현 고향 집으로 백 살 되신 시고모님 수발들러 내려가신다더니, 어쩐 일이세요?”
“시고모는 지난주에 장례 치러드렸어요.”
두 사람은 병실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양순자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아가씨, 제가 듣기로 회장님이랑 사모님, 그리고 도련님까지...”
손아윤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
양순자는 목이 메어 울먹거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렇게 좋으신 분들이 어쩌다 갑자기...”
손씨 가문의 오래된 가사 도우미로서 그녀는 손아윤이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전부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다 1년 전, 유일한 혈육인 시고모가 허리를 삐끗해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되자 손아윤의 부모님께 휴가를 얻어 고향인 등포현으로 내려가 노인을 돌봤던 것이다.
슬픈 소식을 듣고 쉰을 넘긴 나이에 괜히 충격이라도 받을까 봐 손아윤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제가 입원한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택에 갔는데 아가씨랑 사모님이 안 계시더라고요. 대신 아가씨 큰아버지를 만났어요. 그분이 집안에 닥친 불행을 말씀해 주시면서 제가 아가씨를 찾으니까 병원 위치를 직접 알아봐 주셨어요.”
“손허웅이 제 행방을?”
“네, 제가 보는 앞에서 전화를 걸더니 주소를 알려주시기에 바로 찾아왔죠.”
“누구한테 물어보던가요?”
“도 비서라고 하던데요.”
도현우, 최주원의 비서였다.
두 사람은 역시 사적으로 연락하는 사이였다.
손허웅 뒤에 최주원이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가씨는 결혼 생활 좀 어떠세요?”
양순자는 손아윤의 가녀린 팔을 어루만지며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손아윤이 나직이 대답했다.
“그 사람이랑 결혼 안 했어요.”
“네? 결혼식 때 뉴스며 신문이며 온통 난리가 났었는데...”
“식을 올린 건 맞지만 혼인신고는 아직이에요.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과 법적으로 부부 사이는 아니에요.”
실질적인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의 말에 양순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지만 밖에서는 다들 아가씨를 최씨 가문 며느리라고...”
“다 연기에요.”
이 연극은 최지유의 골수 이식 수술이 성공하는 순간 비로소 막을 내릴 터였다.
“그럼 그 양반은 대체 무슨 속셈으로 아가씨를 곁에 두고 있는 거래요?”
양순자는 나이가 들긴 했어도 수십 년간 재벌가에서 가정부로 일해온 몸이었다.
그 바닥의 복잡한 속사정을 전부 알지는 못해도 아예 문외한은 아니었다.
무슨 속셈이냐고?
당연히 그녀의 골수를 노리는 거지.
물론 양순자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이미지 관리하는 거겠죠. 갑자기 천애 고아가 된 여자를 바로 내치기엔 남들 눈도 있고 하니까.”
양순자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최씨 가문처럼 큰 집안에서 명성이라는 게 다 돈으로 연결되는 법이잖아요. 저 이번에 올라온 김에 안 내려갈래요. 여기 남아서 아가씨를 보살펴드려야겠어요.”
손아윤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그러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성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누군가와 다시 깊은 인연을 맺게 되면 피의 복수극에 치명적인 약점이 생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끝내 모질게 거절했다.
“최씨 가문에 가사 도우미는 널렸어요. 게다가 전 지금 아주머니께 드릴 월급을 줄 형편도 안 되고. 쉬는 게 정 힘드시면 제가 좋은 자리를 알아봐 드릴 테니 그쪽에서 일하시는 게 어때요?”
“하지만 아가씨는 이제 혈혈단신이잖아요. 곁에 마음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앞으로 그 고단한 세월을 어찌 버티시려고...”
양순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회장님이랑 사모님이 살아계셔서 아가씨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억장이 무너지셨을 거예요.”
손아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이 겹겹이 쌓여갔다.
그녀는 티슈를 뽑아 양순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했다.
“아주머니, 울지 마세요. 제 몸 하나는 잘 건사할게요.”
양순자가 눈물을 그치며 물었다.
“아가씨, 병원에는 얼마나 더 계셔야 해요?”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요?”
“고향에서 닭 좀 챙겨왔거든요. 잠깐 머무는 곳에 놔뒀는데, 지금 얼른 가서 보신탕 좀 끓여오려고요.”
“정말요? 아주머니 손맛 본 지도 정말 오래됐네요.”
양순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바로 한 마리 잡아다 푹 고아 올게요.”
손아윤이 배웅하려 하자 그녀가 극구 만류했다.
“아니에요, 아가씨는 쉬세요.”
그러더니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끄적였다.
“이건 제 연락처예요. 잘 가지고 계시다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세요.”
손아윤은 종이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시는 길 조심하세요.”
문가에 서서 양순자가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본 뒤, 손바닥에 쥐고 있던 종이를 펼쳤다.
번호는 예전 그대로였지만, 정작 손아윤의 휴대폰과 유심은 진작 최주원에게 압수당한 상태였다.
지금 쓰는 건 그가 새로 마련해 준 기기와 번호였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양순자가 마침 병원 정문에 도착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쳐다보던 그녀는 뒤늦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다 곁눈질로 익숙한 카옌 한 대를 발견했다.
“언니.”
이때, 등 뒤에서 최지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리자, 맞춤 제작한 핑크 토끼 환자복을 입은 최지유가 휠체어에 앉아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어제 주원 오빠가 사다 준 건데, 언니 주려고 조금 남겨뒀어요.”
탁자 위에 밤 무스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평소 좋아하던 것이자 최지유가 즐겨 먹는 디저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