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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주채은은 술을 마시라는 하재호의 말에 깜짝 놀라 강유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안 돼요. 유진 언니가 몸이 안 좋아서 술 마시면 안 돼요.” 강유진이 술에 중독돼 병원에 실려 갔던 그날, 곁에서 함께 자리를 지킨 사람은 주채은이었다. 당시 주채은은 모든 상황을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본 터라 아직도 깊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 의사는 그날 조금만 늦게 왔어도 목숨을 건지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했다. 주채은의 말에 서태우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 강 비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강 비서 술 잘 마시기로 유명하잖아요. 전에 형이랑 프로젝트 얘기하러 갔을 때는 스무 명이 둘러앉은 술자리에서 두 바퀴를 돌아도 멀쩡했는데요. 근데 지금 석 잔도 못 마신다고요? 설마 술도 사람 가려가면서 마시는 거예요? 아니면 윤서 누나 체면 안 세워주겠다는 건가?” 노윤서는 분위기가 더 얼어붙는 걸 막으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우야, 강 비서님도 여자잖아. 너무 몰아붙이지 마.” 서태우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뭘 몰아붙였다고 그래?” 그러곤 하재호를 향해 확인이라도 구하듯 말했다. “형, 내가 억지 부린 거야?” 하재호는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며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강유진을 흘끗 바라본 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억지 아니지.” 그의 대답에 서태우는 더 기세가 올랐다. “그렇지? 형도 억지 아니라잖아. 윤서 누나는 마음이 너무 여려서 큰일이라니까. 강 비서처럼 세상 물정 다 아는 사람이야 자기 이익 챙길 줄 알지.” 서태우의 노골적인 폄하에도 강유진은 맞받아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하재호를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차가운 그의 시선이 마음을 찔렀지만 강유진은 한 줄기 다른 무언가라도 찾고 싶었다. 최소한 그만하라는 한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마치 절망하기 전 마지막 몸부림처럼. 하지만 하재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눈 속엔 오직 냉담함만 남아 있었고 그 순간 강유진은 모든 걸 깨달았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얼음물 한 양동이를 끼얹은 듯 마지막 희망조차 산산이 꺼졌다. 강유진은 허무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술 마시도록 할게요.” 그녀는 술자리를 버텨내기 위해 수많은 요령을 배웠다. 술을 마시기 전에 위를 보호하려 우유를 마시기도 하고 작은 모금으로 천천히 삼키기도 하며 갖은 방법으로 숱한 술자리를 헤쳐 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강유진은 어떤 요령도 쓰지 않고 망설임 없이 술을 들이켰다. 한 잔, 두 잔, 석 잔. 알코올이 목을 넘어가자 매운 기운이 콧속을 찌르고 이미 욱신거리던 위장은 더욱 심하게 뒤틀렸다. 그럼에도 강유진은 태연하게 빈 잔을 흔들어 보였다. “다 마셨어요. 이제 가도 될까요? 하 대표님?” 강유진은 하재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울렁거려 당장이라도 그곳에서 토해버릴까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변기에 매달려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속을 다 토해냈다. 그 순간, 강유진은 술을 마시기 전에 진통제가 아닌 위약을 먹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타고난 주량 따위는 없었고 프라임에 들어오기 전 강유진은 술을 한 모금도 못 마시는 사람이었다. 첫 접대 자리에서 까다로운 클라이언트가 진심을 보이려면 마셔야 한다며 하재호에게 술을 강요했다. 그러나 하재호는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 술을 입에도 대지 못했다. 그때 강유진이 대신 나섰고 그 술이 그녀 인생의 첫 술이 되었다. 경험이 없던 그녀는 한 잔에 목이 막히고 숨이 멎는 듯했지만 눈앞의 기회를 떠올리며 억지로 삼켰다. 그것이 강유진이 하재호를 위해 따낸 첫 프로젝트였고 곧바로 프라임의 발판이 되었다. 하재호는 모든 게 강유진 덕이라며 성공하면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내뱉은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강유진은 숱한 술자리를 홀로 감내했다. 그녀의 주량은 그렇게 한 잔씩 고통 속에서 다져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 모든 희망과 약속은 결국 칼끝이 되어 돌아왔다. 하재호는 마음에 품고 살았던 그 여자를 위해 7년 동안 자신을 위해 살아온 강유진의 마음을 찔렀다. 아픈 만큼 동시에 강유진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벨루나를 나오자 밖에는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늦가을의 비는 예고조차 없었다. 토해낸 직후라 위장은 여전히 쓰라렸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강유진은 휴대폰을 꺼내 택시를 부르려 했으나 하재호의 운전기사가 그녀를 보고 달려왔다. “강 비서님, 술자리가 벌써 끝난 거예요? 하 대표님은요? 같이 안 나오셨습니까?” “네, 아마 조금 더 계실 거예요.” 강유진의 목소리는 허공에 떠 있는 듯 흔들렸다. 룸 안 분위기는 여전히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고 하재호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으니 술자리가 쉽게 끝날 리 없었다. 장지훈은 안쪽을 힐끗 바라보다가 그녀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강 비서님, 제가 먼저 모셔다드릴게요. 이런 날씨엔 택시 잡기도 힘들어요.” 몸 상태가 이미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강유진은 거절하지 않았다. 차가 거의 절반쯤 이동했을 때 하재호가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세요?” 장지훈은 사실대로 말했다. “강 비서님이 몸이 좋지 않아 보여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줄 알고 먼저 모시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온 하재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냉담했다. “월급을 주는 사람이 누군지 잊은 거예요?” 차가운 하재호의 물음에 장지훈은 몸을 움찔하며 말했다. “지금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전화가 끊기기 직전 다시 들려오는 하재호의 목소리는 눈 녹듯 부드러워졌다. “차 금방 도착해. 밖에 추우니까 안에서 기다려.” 노윤서의 살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네가 같이 있어 줘야지.” 이내 전화는 끊겼고 강유진은 그다음 대화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장지훈이 난처한 얼굴로 핸들을 움켜쥐자 강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 기사님, 저 여기서 내려 주세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하지만 이곳은 택시 한 대 잡기 어려운 외진 길이었고 비를 피할 곳조차 없었다. 장지훈은 미안한 마음에 차 안의 우산을 내밀었다. 하루 종일 너무 운이 없어서 하늘의 신이 그녀를 조금 불쌍히 여긴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그러나 다음 날 강유진은 결국 고열에 시달렸다. 유산으로 약해진 체력과 반복되는 위장병, 떨어진 면역력 때문에 작은 비바람조차 견디지 못했다. 하필 그날은 비전 그룹 신현호 대표와 약속이 잡혀 있었다. 바로 회의에서 하재호가 그녀를 꾸짖었던 그 프로젝트였다. 강유진이 체온계를 재보니 열이 38.5도까지 올라와 있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저히 버티기 힘든 열기였다. 해열제를 먹을까 고민했지만 상대는 술상에서만 입을 여는 주정뱅이였다. 강유진은 생각 끝에 결국 약을 서랍에 밀어 넣고 서류만 챙겨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강유진이 주문을 마치자 신현호 대표가 도착했다. 그는 상에 차려진 음식과 술이 모두 제 취향인 걸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강 비서님, 우리 그룹으로 옮길 생각 없어요? 연봉은 원하는 대로 맞춰 드리죠.” 강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하지만 아직 프라임과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서 당장은 옮길 생각이 없습니다.” 늘 해오던 대답이었다. 실력 있는 그녀를 탐내는 곳은 많았다. 한번은 거래처 사장이 술에 취한 채 하재호 앞에서 대놓고 스카우트를 제안한 적도 있었다. 하재호는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 침대 위에서 그녀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결국 강유진이 프라임과 장기 계약을 체결한 뒤에야 그의 분노는 겨우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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