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강유진의 대답에 신현호는 아쉬움과 부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하 대표님은 참 복도 많으십니다. 강 비서님 같은 인재가 곁에 있으니 사업이 성공할 수밖에요.”
“신 대표님, 과찬입니다. 하 대표님과 비교하면 자수성가하신 신 대표님이야말로 존경할 분이지요.”
비록 술자리의 의례적인 대화였지만 신현호는 그녀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제가 이래서 강 비서님과 사업 얘기하기 좋아한다니까요. 강 비서님과 말하다 보면 마음이 편해져요. 자, 제가 한잔 올릴게요.”
“대표님, 간이 안 좋으시잖아요. 이 잔은 제가 마시면 됩니다. 저는 한꺼번에 마실 테니 대표님은 편하게 하세요.”
성격이 시원시원한 사람을 좋아하던 신현호는 강유진의 태도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가 잔을 비우자 그는 다급히 만류했다.
“이렇게 무리할 것 없어요. 이번 프로젝트는 오직 강 비서님과만 계약합니다. 누가 오든 소용없어요!”
“감사합니다, 신 대표님.”
강유진은 곧바로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이때 강유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챈 신현호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한마디 건넸다.
“강 비서님,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여요.”
“괜찮습니다.”
“아니면 제가 기사 불러서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
강유진이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웨이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말했다.
“신 대표님, 하 대표님께서 대표님이 이곳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술을 보내시라고 하셨습니다.”
신현호는 웨이터가 들고 있는 술병을 올려다봤다.
로마네 콩티.
통 큰 선물이었지만 의아한 건 하재호가 같은 식당에 있다면 왜 강유진과 함께 오지 않았느냐는 점이었다.
의문을 던지기도 전에 하재호가 노윤서를 데리고 룸으로 들어왔다.
그는 강유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신현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신 대표님, 이 술 마음에 드십니까?”
하재호는 말쑥하게 다려진 흰 셔츠만 입은 채였다.
치수는 꼭 맞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고급스러운 그의 분위기를 한층 더 살려냈다.
그리고 그의 외투는 노윤서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친밀함.
더구나 그 외투는 강유진이 직접 골라준 옷이었다.
“하 대표님의 성의인데 당연히 마음에 들죠. 그런데 이분은?”
신현호의 시선이 하재호 옆에 서 있는 노윤서에게로 옮겨졌다.
남자가 자기 외투를 건네줬다는 건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일반관계가 아님을 의미했다.
신현호는 무심코 강유진 쪽을 살폈다.
의외로 그녀의 반응은 담담했다. 다만 얼굴이 아까보다 더 창백할 뿐이었다.
“소개해 드리죠. 이분은 프라임캐피탈에서 투자3부를 맡고 있는 노윤서 이사입니다. 윤서야, 이분은 비전 그룹의 신현호 대표님이야. 프라임의 오래된 파트너지.”
노윤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신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요.”
비전 그룹은 프라임과 여러 번 협업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신현호도 프라임 내부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투자3부는 설립된 지 채 1년도 안 되었고 이사 자리는 줄곧 공석이었다.
대부분 사람은 그 자리가 강유진을 위한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3부 프로젝트를 사실상 도맡아 온 사람이 바로 강유진이었다.
그녀는 두 부서를 동시에 책임지면서도 1년 만에 3부 실적을 프라임 최고로 끌어올렸다.
누구보다 큰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였다.
하지만 정작 그 열매는 다른 사람이 따갔다.
심지어 신현호 같은 외부인조차 강유진이 안쓰럽게 보였다.
“참, 신 대표님.”
하재호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프라임과 비전이 함께하는 프로젝트는 앞으로 노 이사 맡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오늘 직접 소개해 드리려고 온 겁니다.”
하재호의 말에 신현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늘 강 비서님과 진행했었는데 갑자기 교체라니요.”
하재호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강 비서는 어디까지나 비서일 뿐입니다. 노 이사가 부재중이었기에 임시로 맡겼던 거죠. 이제 본인이 돌아왔으니 당연히 제자리를 찾아야죠.”
그는 이어서 덧붙였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노 이사는 마레시아 웨스트 경영대학에서 금융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해외 최고 은행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어요. 제가 직접 스카우트한 인재인 만큼 능력은 확실할 겁니다.”
신현호가 걱정한 건 능력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강유진이 안쓰러웠다.
그녀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쏟은 노력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이렇게 허무하게 뺏기다니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강유진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하재호가 노윤서를 위해 직접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은 그녀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배려였다.
강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른 시일 안에 자료를 정리해서 노 이사님께 인계하도록 할게요.”
“수고해 주세요, 강 비서님.”
노윤서는 공손히 화답했다. 강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 대표님, 이제 노 이사님과 편히 얘기 나누시죠.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붙잡고 싶었지만 입장이 애매했던 신현호는 은근히 강유진의 편을 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회사 내부 방침이라면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겠죠. 누구와 일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하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전 사람을 술잔으로 알아가는 스타일입니다. 처음 강 비서님도 아홉 잔을 한 번에 마시는 걸 보고 크게 감탄했었지요. 노 이사님은 주량이 어떠신가요?”
“강 비서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신 대표님이 원하신다면 저도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노윤서는 당당하게 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잔을 입에 대기도 전에 하재호가 잔을 낚아채며 말했다.
“노 이사는 몸이 안 좋으니 이 술은 제가 대신 마시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신현호는 순간 당황했다.
하재호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다는 건 업계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와 동석하는 술자리에서는 늘 강유진이 대신 술을 마셔왔다.
그런데 그런 하재호가 지금 처음으로 다른 여자를 위해 술을 대신하고 있었다.
문을 나서는 강유진 역시 같은 의문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강유진이 약을 먹고 침대에 눕자마자 신하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요즘 제대로 쉬고는 있는 거야? 건강은 좀 회복됐어? 의사 말대로 술은 입에도 안 댔지?”
강유진이 얼버무리듯 대답하자 신하린은 단번에 눈치를 챘다.
“또 술 마신 거야?”
“일이니까 어쩔 수 없었어.”
“너 정말 죽고 싶니? 술 때문에 죽을 뻔한 걸 벌써 잊었어? 하재호 그 인간은 대체 왜 아직도 널 술자리로 부르는데!”
“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그 말 전에 몇 번을 들었는지 알기나 해?”
“이번엔 진짜야.”
“어떻게 보여줄 건데?”
잠시 생각하던 강유진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아는 변호사 있어? 프라임 법무팀이랑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
신하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프라임과 계약을 해지하려고 해.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예전에 장기 계약을 맺었잖아. 조항도 불리하게 돼 있고 법무팀도 만만치 않으니 웬만한 변호사는 맡으려 하지도 않을 거야.”
그제야 신하린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너 진짜 강유진 맞아?”
“진짜 강유진 맞아.”
“세상에! 드디어 사랑에 눈이 멀었던 네가 정신을 차렸구나! 오늘 축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신하린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강유진이 쉬어야 하는 상태만 아니었으면 당장이라도 불러 밤새 떠들고 싶을 정도였다.
“변호사는 내가 알아봐 줄게. 걱정 말고 푹 쉬어.”
전화를 끊기 전까지도 신하린은 꼭 잘될 거라며 강유진을 안심시켰다.
누군가와 속 얘기를 나눈 덕분인지 강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고 곧 잠이 솔솔 몰려왔다.
그러나 막 잠들려던 순간 하재호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강유진은 평온한 목소리로 받았다.
“하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알레르기약 좀 가져다줘.”
그는 언제나처럼 당연하게 명령했다.
“네, 하 대표님.”
통화를 마친 강유진은 곧장 휴대폰 전원을 꺼버린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른 여자를 위해 알레르기까지 마다하며 술을 마시는 그를 더 이상 챙겨주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