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다음 날, 강유진이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주채은은 아침에 발견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어젯밤 노 이사님과 하 대표님이 함께 계셨던 것 같아요.”
주채은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듣지 않을까 조심하는 기색이었다.
주채은이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그녀가 몰래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아침에 두 사람이 같은 차를 타고 왔는데 노 이사님 옷차림이 어제 그대로였어요.”
강유진은 화면 속 사진을 힐끗 바라봤다.
차 문 앞에 서 있는 하재호의 얼굴 일부는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고 내리려는 노윤서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얽혀 있었다.
촬영 각도 때문인지 사진에는 어딘가 감정이 담긴 듯한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강유진은 몇 초 동안 묵묵히 사진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고 손에 움켜쥐고 있던 약을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뜨거운 물을 여러 모금 마시며 약을 삼켰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유진은 아침 시간을 이용해 맡고 있던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정리하고 사직서까지 작성했다.
그 사이 노윤서는 하재호의 사무실을 네 번이나 들락거렸고 매번 30분 이상 머물렀다.
옆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기분이 좋았는지 하재호는 어젯밤 강유진이 그를 기다리게 한 일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하재호는 노윤서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하재호는 강유진 앞을 지나면서 단 1초의 멈칫거림도 없었다.
노윤서는 하재호한테 점심에 뭘 먹고 싶냐고 물으며 어제 술을 대신 마셔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하재호는 근처에 좋은 보양탕 집이 있다며 기혈 보충에 좋은 대표 메뉴가 지금 그녀에게 적합하다고 말했다.
노윤서는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호야, 신경 써줘서 고마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강유진은 사직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주채은이 점심을 뭐 먹을지 묻자 강유진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우리 당기 보양탕 집 가자.”
주채은은 좋다고 했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강유진이 들어서자 하재호와 노윤서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자리는 너무 눈에 띄는 위치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어요?”
주채은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강유진은 태연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저쪽에 빈자리 있어.”
강유진을 알고 있던 종업원은 그녀가 자리에 앉자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강유진 씨, 오늘도 산조인탕 포장하러 오신 거예요?”
강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은 위에 좋은 탕으로 할게요.”
“대표님 불면증은 좀 나아지셨나요?”
종업원이 무심코 물었다.
강유진은 매번 당기에 올 때마다 하재호를 위해 불면증에 좋다는 산조인탕을 포장했었다.
그렇게 몇 번 드나들다 보니 그녀는 가게의 단골손님이 되었고 대부분의 종업원이 강유진을 알게 된 거였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 그래서 이제 산조인탕은 포장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강유진은 앞으로 자신의 몸이나 잘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주채은이 종업원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기혈을 보충할 수 있는 탕이 있나요? 요즘 생리 중이라 기혈이 부족해서 금세 저혈당이 와요.”
종업원은 웃으며 답했다.
“마침 있어요. 오늘 당귀 오골계탕을 세 그릇 했는데 딱 한 그릇 남았어요. 운이 좋으시네요. 나머지 두 그릇은 방금 저쪽 손님이 여자 친구를 위해 사셨거든요.”
종업원의 말투에는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에요. 남자도 여자도 너무 훌륭해 보이고 무엇보다 남자가 여자에게 너무 잘해주더라고요. 요즘 저런 남자 보기 힘들죠.”
주채은은 종업원의 입을 막고 싶었다. 말하는 상대가 바로 하재호와 노윤서였기 때문이었다.
하재호가 노윤서를 위해 특별히 보양탕 집에 데려온 건 노윤서가 생리 중이라 기혈 보충이 필요하기 때문이었고 어제 술을 대신 마셔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그만큼 친밀하고 깊은 관계였다.
7년을 사귀는 동안, 하재호도 강유진한테 다정하고 배려 깊은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부부 사이도 7년이면 권태기가 온다는 말이 있듯이 강유진과 하재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프라임이 발전하고 사업 영역이 넓어지면서 하재호는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강유진은 마지막으로 두 사람만의 단독 데이트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니 세심한 배려 따위는 더욱 있을 리가 없었다.
종업원이 자리를 떠나자 주채은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언니, 괜찮아요?”
강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응, 괜찮아.”
당기 보양탕 집은 그 맛과 효능이 역시 뛰어났다.
탕을 두 그릇이나 마시고 나니 위 전체가 따뜻하게 감싸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사람은 역시 자신을 먼저 아끼고 챙겨야 했다.
남에게 베푼다고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에는 반드시 응답이 따르는 법이었다. 그것도 가장 곧고 직접적으로.
...
오후에는 투자 결정 회의가 있었는데 노윤서가 투자3부 이사로서 처음 참석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신임 이사의 능력을 궁금해했다.
노윤서가 마레시아 웨스트 경영대학에서 금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며 자신을 소개하자 회의실은 놀라움으로 술렁였다.
“하 대표님이 직접 해외에 나가서 스카우트할 만하네요.”
“학력이 어마어마하네요. 얼굴도 예쁘시고.”
“낙하산으로 들어올 만도 했네요.”
마레시아 웨스트 경영대학은 세계에서도 이름 있는 명문대였고 그런 곳에서 금융학 박사까지 취득했으니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노윤서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외모까지 출중했다.
원래 강유진이 안쓰럽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노윤서 쪽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한 존재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유진은 그저 국내에 있는 평범한 대학 출신일 뿐 석사조차 취득하지 못했으니 노윤서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유진은 담담하게 평소처럼 회의록 작성에 집중했다.
다만 [웨스트 경영대학]이라는 글자를 입력하는 순간 손끝을 멈칫했다.
예전에 강유진도 웨스트 경영대학으로부터 입학 제안을 받았지만 하재호를 돕기 위해 기회를 포기했었다.
그때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강유진의 대학교수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결국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그때의 선택이 대가가 되어 패배를 맞게 되었다.
노윤서의 학력 덕분에 하재호가 그녀에게 비전 그룹 프로젝트를 맡겼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로젝트는 마치 노윤서가 직접 따온 것처럼 보였다.
주채은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강유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니, 비전 그룹 프로젝트가 어떻게 노 이사님 걸로 되는 거예요?]
주채은은 화가 치밀어 강유진이 회답하기도 전에 연달아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언니, 그거 언니가 위까지 상해 가면서 술 마시며 따낸 거잖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하 대표님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말 이해가 안 되네요. 언니! 억울하지 않아요?]
[저는 지금 화나서 미쳐버릴 것 같아요!]
강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회답했다.
[별거 아니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 나 괜찮아.]
7년 동안 사랑했던 하재호도 포기할 수 있었던 강유진한테 단 하나의 프로젝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주채은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언니가 겨우겨우 따낸 프로젝트잖아요. 하 대표님은 언니가 이 프로젝트 때문에 아이까지 잃었던 건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