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강유진의 마음속 깊이 감춰져 있던 아픔이 서서히 번져 나왔다.
천장에 매달린 창백한 형광등 불빛, 공기 속에 섞인 소독약 냄새, 수술 후 느껴진 차가움.
그 기억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었고 뼈와 살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도 영원히 남을 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아이도 무언가를 미리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몰래 왔다가 또 몰래 떠난 것일지도.
마치 그녀를 위해 시련을 대신 겪으러 온 것처럼.
회의가 끝나자 노윤서는 주채은에게 방금 회의록을 보내 달라고 했다.
주채은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정리 안 됐어요.”
“그럼 정리해서 보내요.”
“바빠 죽겠는데 그걸 정리할 새가 어디 있어요.”
노윤서가 눈썹을 찌푸리며 주채은을 흘겨보았지만 주채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유진을 도와 회의실을 정리했다.
노윤서가 떠난 뒤 강유진은 주채은에게 조용히 말했다.
“채은아, 기억해. 감정을 일에 끌고 오면 안 돼. 프라임에서는 용납되지 않아. 여기서 오래 일하고 싶다면 누구와도 적대적이지 않게, 특히 직급이 높은 사람을 건드리지 마.”
“언니 때문에 억울해서 그러죠.”
“억울할 게 뭐가 있어.”
강유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감정이란 게 결코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재호에게 잘해준 건 강유진 자신의 선택이었고 하재호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던 그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 사이를 억지로 등호로 이어 버리는 순간, 결국 괴로운 자기 자신이라는 걸 강유진은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하재호를 사랑했기에 유학 기회를 포기하고 그의 창업을 도왔으며 함께 달려왔다.
결과가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강유진은 자신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적은 때로 자기 마음속에 갇혀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는 나라는 것을 강유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의 끝은 누구에게나 지치고 아픈 일이었다.
강유진은 그저 조금 시간이 필요할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분명 이 상황을 벗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리라 다짐했다.
퇴근 직전, 강유진은 노윤서에게 투자3부의 모든 프로젝트 자료를 정리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가져다주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노윤서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강 비서님, 자료를 재호 사무실로 가져다주실래요? 막 귀국하다 보니 국내 사업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서 재호랑 같이 분석해야겠어요.]
노윤서는 ‘재호’라는 이름을 참으로 친근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부르고 있었다.
물론 하재호 역시 그 호칭을 단 한 번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강유진이 아는 하재호는 회사에서 직함을 생략하는 걸 유달리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7년 동안 강유진은 그 점을 철저히 지켜왔다.
회사에서든 외부 접대 자리에서든 늘 ‘하 대표님’이라 조심스럽게 부르며 맡은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모든 것은 그저 우스운 일이었다.
하재호의 규칙은 외부인을 위한 것이었고 강유진은 결국 그 외부인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규칙 따위 두지 않았다.
강유진은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뒤 미리 정리해 둔 자료와 하재호 서명이 필요한 문서를 함께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서명을 마친 사직서도 서류 더미 속에 넣었다.
하재호가 서명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절차는 반드시 밟아야 했다.
강유진은 자료를 안고 하재호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노크한 뒤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것은 하재호가 그녀에게 허락한 유일한 특권이었다.
어쨌든 강유진은 하재호의 비서였고 업무상 많은 부분에서 얽혀 있었기에 시간을 절약하고 효율을 높이려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오랜 습관이 몸에 배어 노크 후 곧장 들어가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문을 열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강유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노윤서가 하재호 책상 위에 앉아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상상 이상의 친밀한 모습이었다.
“어머!”
강유진이 갑자기 들어오자 노윤서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하재호의 품으로 떨어졌다.
하재호는 얼굴을 찡그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노크할 줄 몰라?”
강유진은 분명 노크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의미 없음을 알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몰라!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하재호의 얼굴은 냉담했고 날카로운 어조는 그녀에게 준 특권 따위는 잊은 듯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강유진은 조용히 사과했다. 어차피 다시 들어올 일은 없을 테니까.
노윤서는 그제야 하재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두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긴장과 놀람으로 반짝이는 눈빛이 그녀를 한층 더 생기 있어 보이게 했다.
“재호야, 무섭게 왜 그래. 강 비서님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노윤서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하재호에게 말하더니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강유진을 바라보았다.
“강 비서님, 프로젝트 자료 가져오신 거죠? 그쪽 책상 위에 올려주세요. 지금은 받기 좀 불편해서.”
강유진은 감정을 억누른 채 자료를 책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여기 하 대표님 서명이 필요한 문서도 있습니다.”
“알겠어요. 이만 나가서 일 보세요.”
노윤서는 마치 주인이라도 된 듯 지시했고 하재호도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일 아니면 방해하지 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강유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네.”
짧게 대답한 뒤, 강유진은 숨 막히는 사무실을 나왔다.
정신이 어지러워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노윤서가 하재호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사실만은 또렷했다.
하재호 역시 노윤서를 밀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가 분노를 터뜨린 이유는 그저 강유진이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7년 동안 이성을 잃은 하재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치 그가 평소 보여줬던 냉정과 이성이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충동과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낮 사무실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강유진은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비서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유진은 프라임에서 ‘일벌레’로 유명했고 지금까지 연중 내내 회사에서 최고 초과근무 기록을 세워 왔다.
특히 투자3부를 맡은 이후로는 거의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 그녀가 정시에 퇴근하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강유진이 회사를 나서자마자 헤드헌터 조우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동안 그는 여러 차례 강유진을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예전 같았으면 강유진은 전화를 바로 끊거나 적당한 핑계를 대고 미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강유진이 주저 없이 전화를 받자 깜짝 놀란 조우진은 자신이 왜 전화를 걸었는지조차 잠시 잊을 만큼 당황했다.
조우진이 머뭇거리는 사이 강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 대표님, 시간 되시면 같이 식사하실래요?”
조우진은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강 비서님이 시간만 내주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다 되죠.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제가 레스토랑 예약할게요.”
“괜찮으시면 조금 담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해주세요. 위가 좋지 않아서요.”
조우진은 단번에 동의했다.
“좋아요. 장소 정하면 바로 위치 보내드릴게요. 잠시 뒤에 봬요.”
“네.”
강유진은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회사에서 멀지 않았다. 월세가 높긴 했지만 출퇴근과 야근이 편리했다.
예전에 하재호는 강유진이 왜 이렇게 좁고 지저분한 데서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한 번 들른 뒤로는 다시는 오지 않았고 필요할 때마다 늘 강유진이 하재호의 집으로 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