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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고태빈, 지금 나더러 네 내연녀 산후조리를 도우라고?” 서규영은 감자를 썰다가 조심스럽게 식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빛으로 고태빈을 바라보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서규영의 눈빛에 고태빈은 순간 흠칫하며 자책 어린 눈빛을 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고태빈은 생선 비늘이 튄 서규영의 앞치마를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해은이는 내연녀가 아니야.” 서규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경멸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랑 사생아까지 낳았으면서 내연녀가 아니라고?” 사생아라는 말을 듣자 고태빈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그의 목소리가 한결 차가워졌다. “말했잖아. 내 아이 아니라고. 해은이는 이제 막 귀국했고 여기 가족들도 없어. 해은이는 나를 친구로 생각해서 찾아온 거야. 해은이 출산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산후조리원 음식이 입에 맞지 않대. 그런데 마침 네가 요리를 잘하잖아. 그래서 해은이를 위해 영양가 풍부한 음식을 만들어주기를 바란 거야. 뭐 대단한 거 해주라는 것도 아니고 하루 세 끼 준비해서 가져다주는 것뿐이잖아. 넌 어차피 집에서 할 일도 없을 텐데 할 일 있으면 보람 있고 좋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질색하는 거야?” 서규영은 눈앞의 잘생긴 남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실망이 켜켜이 쌓여갔다. 서규영은 고태빈을 고등학교 3년 내내 짝사랑하다가 대학교 1학년 때 그에게 고백하고 졸업하자마자 그와 결혼했다. 고태빈을 위해 서규영은 모든 걸 포기하고 남편을 내조하며 살림에 전념하는 가정주부가 되었다. 고태빈을 알게 된 지는 10년이 넘었다. 서규영은 고태빈이 불행한 가정사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차갑고 무뚝뚝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10년간 따스한 햇살이 되어 그를 밝게 비춰주며 그를 차갑고 무정한 세상에서 꺼내주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서규영이 지니고 있던 모든 빛이 사그라졌다. 고태빈이 태생적으로 냉정한 사람이었다면 그냥 인정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규영의 예상과 달리 고태빈은 태생적으로 정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차가운 심장을 녹일 수 있는 사람이 그녀가 아니었을 뿐이다. 서규영은 며칠 전에야 비로소 고태빈에게 10년 동안 사랑한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태빈, 네 눈에는 내가 매일 하는 일 없이 한가해 보이나 봐? 네게 내 시간과 내가 하는 일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어 보이지?” 고태빈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규영아, 억지 부리지 마. 고작 밥 몇 끼 해달라는 것뿐이잖아. 어차피 너도 매일 밥해야 하니까 장 볼 때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사서 준비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어? 우리 집이랑 산후조리원 가까워.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데 시간이 걸리면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 “나 평소에 너한테 뭐 해달라고 한 적도 없잖아. 넌 출근해서 돈을 벌 필요도 없고 카드에 있는 돈도 마음껏 쓸 수 있어. 돈 걱정할 필요도 없이 마음 편히 부잣집 사모님으로 살면 되는데 뭐가 불만이야? 진짜 별거 아닌 일인데 내가 겨우 이런 걸로 너한테 빌어야겠어?” 서규영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이런 싸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끊임없이 가정을 위해 헌신했던 서규영이 고태빈에게 바란 것은 그저 작은 온정일 뿐이었으나 그것은 어느샌가 집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이 끊어진 것만 같았다. 서규영은 화를 내지도, 악을 쓰지도 않았다. 그저 도마 위에 올려두었던 식칼을 들고 계속해 감자를 썰었다. 서규영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난 시간 없어. 밥해서 가져다줄 생각도 없고.” “넌 그냥 집안일이나 하는 가정주부잖아. 밥하는 것 빼고 네가 하는 게 뭔데?” 고태빈은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뒤에는 적절하지 않은 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눈앞의 맨얼굴을 하고 편한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식칼을 든 채 몸에서 물고기 비린내를 풍기는 서규영을 바라보자 자기도 모르게 일주일 전 자신을 찾아왔던 박해은이 떠올랐다. 박해은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사무실 앞에 나타났다. 공들여 화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10cm는 될 듯한 하이힐을 신고 말이다. 비록 출산을 앞둔 임산부였지만 그녀에게서는 타고난 듯한 우아함과 청초함이 느껴졌다. 눈앞의 여자와는 전혀 달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죄책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규영이 갑자기 힘주어 식칼로 도마를 내리쳤고, 고태빈은 서규영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서규영은 겨우 몇 걸음 만에 고태빈의 앞에 섰다. “가정주부? 그동안 네 눈에 나는 그냥 가정주부였나 보네. 고태빈, 잊었나 봐. 나는 졸업하자마자 내셔널 칩 프로젝트 스카우트를 받았어. 그런데 네가 창업하겠다고 해서 나는 내 모든 걸 포기하고 투자자를 찾아다니고, 프로젝트를 알아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많은 벽에 부딪혔어. 그러다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을 때쯤, 너는 너무 힘들다고 한탄하면서 네 엄마랑 여동생이 시골에서 이사 올 거라고 했어. 그래서 나한테 일을 그만두라고, 일을 하는 것보다는 네 내조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네가 믿는 건 나뿐이라고 했지.” “그런데 이젠 내가 집안일밖에 할 줄 모르는 가정주부로 보이나 봐. 그것도 돈 걱정 없고 할 일도 없는 한가로운 부잣집 사모님으로. 고태빈, 잊지 마. 너를 만나기 전에도 나는 살면서 돈 걱정 한 번 안 해본 사람이었어. 그리고 능력이 없어서 너한테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해빈 테크의 핵심 기술도 내가...” “그만. 별 의미도 없는 옛날얘기를 언제까지 할 거야?” 고태빈은 수치스러웠는지 갑자기 화를 냈다. “네가 서씨 가문 아가씨라는 거 알아. 3대째 재벌이라서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 키워졌겠지. 하지만 이제 너는 내 아내고 우리 고씨 가문 사람이야. 나랑 결혼했으면 당연히 우리 집안 규칙을 따라야지. 나는 너의 그 제멋대로인 성격을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네 집안을 들먹거리면서 내 기를 죽일 생각인가 본데, 나 고태빈은 권세 앞에 무릎 꿇는 그런 비굴한 인간이 아니야.” “해빈 테크 창립 초기에 네가 날 좀 도와준 건 맞아. 하지만 넌 일을 그만둔 지 2년이나 됐어. 그동안 회사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알아?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바뀌는데 아직도 예전에 쌓았던 네 그 보잘것없는 공으로 생색을 내려고? 우습지 않아?” “우리 회사 곧 상장해. 내가 시가총액 수조 원의 유니콘 기업 회장이 되면 너도 내 아내로서 체면이 서게 될 거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네 분수를 지키며 얌전히 지내는 거야. 쓸데없이 문제 일으키지 마.” 고태빈은 고개를 숙인 서규영을 바라보면서 강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해은이가 먹을 음식은 매일 저녁 6시에 때맞춰서 산후조리원 888번 병실로 보내.” 고태빈은 몸을 돌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으면 이혼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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