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결혼한 지 3년 만에 고태빈은 처음으로 이혼을 언급했다. 그는 진심으로 이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오늘 서규영의 말에 화가 나서 홧김에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동안 서규영은 늘 고분고분했고 그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줬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리 매우 강경한 태도로 나왔고, 고태빈은 그녀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동시에 고태빈은 서규영이 자신과 이혼할 리 없다고 믿었다.
지난 10년간, 서규영은 그의 껌딱지처럼 그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히 예전처럼 타협하고 먼저 고개를 숙일 것이다.
고태빈은 서규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이혼을 언급했을 때 서규영이 깜짝 놀라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다르게 서규영은 그를 지긋이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름 끼칠 정도로 무덤덤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고태빈의 어머니 장경희가 문을 열며 말했다.
“규영아, 나 혈당 체크 좀 해줘.”
장경희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고 지난 2년간 장경희의 혈당을 측정해 주는 것은 서규영의 몫이 되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두 시간 뒤 혈당을 측정해야 해서 매일 여섯 번씩 혈당을 측정했다.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서규영은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늦잠을 자본 적이 없었고 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다.
서규영은 몇 번이나 장경희에게 혈당을 측정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했었으나 장경희는 매번 혈액공포증이 있어 피를 보면 어지럽다는 핑계로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고태빈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서규영의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한 마디를 남긴 뒤 떠났다.
“우리 어머니 혈당 측정해 줘. 난 회사 가볼게.”
말을 마친 뒤 곧장 몸을 돌렸다.
한편, 장경희가 또 한 번 재촉했고 서규영은 그제야 장경희의 방으로 향했다.
서규영은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침대 옆 서랍 안에 들어 있던 혈당측정기를 꺼냈다.
장경희는 옆에서 끊임없이 잔소리했다.
“규영아, 너 박해은 때문에 태빈이랑 싸우면 안 돼. 태빈이는 한 회사의 회장이야.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소한 일로 태빈이를 언짢게 만들면 안 되지. 아내로서 그렇게 철없이 굴면 안 돼.”
서규영은 멈칫한 뒤 곧바로 핵심을 찔렀다.
“박해은이요? 그러니까 고태빈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다는 거네요? 그런데 저한테 아무 말씀 안 하신 거예요?”
서규영은 3일 전에야 박해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서규영의 친구가 백화점에서 고태빈이 아기용품을 사는 걸 보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가 그가 가장 고급스러운 산후조리원으로 들어가는 걸 발견했다.
그 일을 전해 들은 서규영은 고태빈에게 설명을 요구했고 당시 고태빈은 그 여자를 언급할 때마다 성은 얘기하지 않고 이름만 불렀다.
그래서 서규영은 그 여자의 성이 박씨라는 걸 몰랐는데 장경희는 이미 그 여자의 성을 알고 있었다.
고태빈이 알려주었거나 예전부터 그 여자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장경희의 얼굴에서 미안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서규영을 향한 불만만 보였다.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박해은이 내연녀일 리가 없지. 걔는 우리 고씨 가문의 공신이라고. 너는 태빈이랑 오래 연애했고 결혼한 지도 3년이 지났어. 그런데 그동안 아이 하나 낳지 못했어. 여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니? 그건 바로 아이를 낳아서 가문의 대를 잇는 거야. 네가 아이를 낳지 못하니까 태빈이가 밖에서 씨를 남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
“내 아들은 개천에서 난 용이야. 태빈이처럼 지위가 높은 남자들 옆에 여자가 많은 건 당연한 일이지. 아내로서 네가 할 일은 그냥 눈감아주는 거야. 너희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내가 보니까 박해은 걔 진짜 괜찮은 것 같아. 귀국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배가 나온 채로 나한테 선물도 주러 왔다니까. 게다가 다 비싼 보석들이었어. 얼마나 센스가 좋던지. 어차피 걔 아이도 낳았으니까 너그럽게 받아주고 걔랑 잘 지내봐. 네가 걔를 받아줘야 우리 고씨 가문도 너를 받아줄 수 있어. 그래야 너도 마음 편히 재벌가 사모님으로서 비싼 거 먹으면서 이렇게 호화로운 집에서 편히 지내지...”
장경희가 쏟아낸 말들에서 자신의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서규영을 향한 경고, 그리고 박해은이라는 여자를 향한 두둔과 편애가 느껴졌다.
서규영은 이 모든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장경희는 시골에서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까지만 해도 안 아픈 데가 없었고 허리도 구부정했다. 서규영은 그런 그녀를 위해 많은 명의들을 모시고 좋은 약을 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심성의껏 장경희를 돌봤고, 그 덕분에 장경희는 이제 제법 귀부인 같아졌다.
반대로 서규영은 까탈스럽고 성가시게 구는 장경희 때문에 기운이 빠져 꾸밀 힘도 없어서 아줌마 같아 보였다.
그러나 서규영은 단 한 번도 속이 좁은 데다가 고루한 생각을 지닌 장경희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장경희가 고태빈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서규영은 진심으로 그녀를 가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젠 그간의 노력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서규영은 조금 전 고태빈과 한바탕 싸워 기력이 빠진 상태라 장경희와 싸울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지금 어머님께서 살고 계시는 이 집은 저희 친정에서 저한테 선물로 준 건데요.”
그 말에 장경희는 얼이 빠졌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100평이 훌쩍 넘는 주택이었고 심지어 노른자 땅이어서 시가로 최소 160억은 되었다. 환경도 좋고 보안 수준도 높은 아주 훌륭한 곳이다 보니 남에게 떠받들리며 사는 느낌이라 우월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이 집은 서규영의 말처럼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 서규영의 친정에서 서규영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장경희는 곧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머, 얘 좀 봐? 너 이제 우리 고씨 가문 사람이잖아. 그러면 누가 샀든 무슨 상관이니? 결혼했으면 네 것이 태빈이 것이지.”
“악!”
장경희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가락에 통증을 느꼈다.
평소 서규영이 혈당 체크를 도와줄 때는 손가락이 아픈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너무 아파서 손이 떨렸다.
마치 송곳 같은 것이 그녀의 손가락 안을 후벼파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숙인 장경희는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았다.
“서규영, 너 지금 이 늙은이를 찔러 죽이려는 거야?”
서규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졌네요.”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나는 너 생각해서 한 말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양심도 없지.”
서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들고 있던 혈당측정기를 내던졌다.
“진짜 양심 없는 사람이 누군데 그런 말씀을 하시죠? 2년 전 어머님께서는 여기 오셨을 때 얼굴빛도 누렇고 공복 혈당이 170이라 케톤산증이 언제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때 저는 바로 어머님을 병원으로 모셔가서 입원 절차 밟아드렸고, 의사 선생님이 인슐린 주사 맞아야 한다고 했을 때 실력 좋은 의사 선생님 찾아가서 신약도 얻어왔어요. 그 덕분에 어머님은 매일 약 한 알만 먹으면 혈당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요. 그리고 고혈당도 있으셔서 전 지난 2년간 영양사 자격증까지 따서 매 끼니 따로 챙겨드렸어요.”
“그리고 나율이도 제가 매일 아침 따로 챙겨주고, 점심 가져다주고, 저녁에는 열두 시까지 숙제랑 공부하는 거 도와줬어요. 제가 그동안 한 게 얼만데 이렇게 저를 모욕하고 무시하시는 거죠?”
서규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전에 서규영의 오빠는 서규영의 고집이 너무 세다고, 한 번 마음먹으면 절대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서규영은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전부 맞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규영의 진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비록 억울했지만 억울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제라도 돌아서야 했다.
장경희는 서규영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서규영은 늘 온순하고 부지런하며 유능했었기에 장경희는 서규영이 화를 낼 줄 안다는 걸 깜빡했다.
장경희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건 모두 네가 자초한 거야. 우리는 너한테 강요한 적 없어. 내 아들처럼 훌륭한 남자랑 결혼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이것들은 원래 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이야. 너 자꾸 이렇게 만족 못 하면 우리 아들한테 너랑 이혼하라고 할 거야.”
서규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혼할 거니까요. 그리고 고태빈이 아니라 제가 먼저 이혼하자고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고리타분한 어르신.”
말을 마친 뒤에는 곧장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장경희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더니 서규영의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너, 너, 너...”
서규영은 멜밸리에서 나온 뒤 곧장 정민서가 있는 로펌으로 갔다.
정민서는 서규영이 이혼하겠다고 하자 서규영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10년이야. 나 진짜 10년 동안 너 설득했던 거 알지? 이제야 드디어 상향혼한 그 자식이랑 헤어지는구나. 고태빈이랑 평생 살기엔 네가 너무 아까워. 대체 고태빈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거야? 역시 하늘은 공평해. 넌 머리는 똑똑한데 안목이 너무 낮아. 그래도 다행이다. 이젠 정신을 차렸잖아. 감사합니다. 하느님, 부처님...”
정민서는 갑자기 사무실에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서규영은 마음이 복잡했다.
10년간 이어진 인연을 끝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절은 그만하고 지금 바로 이혼합의서 작성해 줘.”
정민서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사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가서 서랍을 열어 서류를 꺼냈다.
“받아.”
서규영은 당황했다.
“이렇게 빠르다고?”
정민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난 너희가 이혼할 줄 알았거든. 네가 내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태빈과 결혼하려고 했을 때 이미 작성해 뒀었어.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