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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정민서는 서규영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규영에게 가장 유리하도록 이혼합의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이때 서규영이 입을 열었다. “이 부분 수정해 줘. 난 그 회사 주식 필요 없어.” 정민서는 경악했다. “너 바보야? 이혼하는데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야지. 해빈 테크는 지금 엄청 발전했어. 상장하면 주가가 몇 배는 더 뛸 거야. 네게 돈 욕심이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해빈 테크는 네가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 곳이야. 그런데 그걸 그 빌어먹을 놈한테 줄 수는 없지.” 서규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해빈 테크는 상장할 수 없어. 주가도 이제 곧 폭락해서 빚더미에 앉게 될 거야.” 서규영은 고개를 들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주식을 달라고 해도 고태빈은 주지 않을 거야. 그러면 소송까지 가겠지. 그렇게 되면 귀찮아져.” 정민서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서 또한 그 점을 인정했다. 고태빈은 절대 서규영에게 주식을 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간을 오래 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민서는 서규영이 갑자기 마음을 바꿀까 봐 걱정되었다. 정민서는 빠르게 내용을 수정했고 서규영은 수정이 끝난 뒤의 합의서를 들고 차로 돌아갔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고태빈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규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욕설이 쏟아졌다. “서규영, 너 우리 어머니한테 뭐라고 한 거야? 너 왜 이렇게 막 나가? 교양 넘치는 명문가 딸 같은 모습은 전혀 없잖아.” 서규영은 망설임 없이 반박했다. “그래. 널 만나기 전까지는 교양 넘치는 명문가 딸이었지. 그런데 너랑 결혼한 뒤에는 이렇게 막 나가는 여자가 됐어. 그게 누구 탓이라고 생각해?” 고태빈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 “서규영, 넌 뭐가 그렇게 당당해? 우리 어머니는 너 때문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실 뻔했어. 이건 명령이야.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그러면 이 일은 그냥 넘어가 줄게.” 아주 거만한 어투였다. 서규영은 문득 고태빈이 언제나 자신을 그런 건방진 태도로 대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서규영은 고태빈의 성격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해서 굳이 따지지 않았는데 지금 들으니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거슬렸다. 서규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태빈은 서규영이 타협했다고 짐작했고, 그제야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물론 우리 어머니가 말을 좀 심하게 했겠지. 우리 어머니 시골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해. 그리고 어른인데 네가 더 효도해야지. 지금 장 봐서 점심에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는 해물찜 해드리고 전신 마사지도 해 줘. 우리 어머니는 뒤끝 없는 사람이라 그 정도만 해줘도 금방 화가 풀릴 거야. 참, 점심 만들 때 삼계탕 좀 끓여줘. 해은이가 점심으로 삼계탕을 먹고 싶대. 이제 그만 화 풀어. 오늘 야근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저녁 먹을 테니까. 응?” 마지막 말을 할 때 고태빈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웠다. 예전에 서규영은 고태빈이 조금만 다정하게 굴면 매우 기뻐하면서 그가 아무리 선 넘는 요구를 해도 기꺼이 들어주었고, 자신을 괴롭게 하거나, 불편하게 한 일들을 그냥 묻어버렸다. 그랬던 서규영이 이제야 비로소 고태빈의 실체를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의 이기적이고 가시적인 모습을 보려니 역겨웠다. 심지어 고태빈이 갑자기 다정해진 이유는 그녀가 박해은을 위해 삼계탕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서규영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손에 이혼합의서를 든 채 애써 감정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 있어?” 이미 열한 시라서 곧 점심시간이었다. 서규영은 고태빈이 어디에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태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미소 산후조리원에 있어. 점심 다 만들면 가져와. 참, 최대한 많이 해. 나도 아직 점심 안 먹었거든.” “그래. 금방 갈게.” 서규영이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뒤 고태빈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서규영이 조금 더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굴복할 줄은 몰랐다. 아마도 아침에 이혼하자는 말에 겁을 먹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고태빈은 우쭐해했다. 그동안 서규영도 화를 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서규영이 화를 낼 때마다 고태빈은 강압적인 방법이나 달래는 방법을 사용해서 서규영을 이기려고 했다. 고태빈도 서규영에게 박해은의 산후조리를 도우라고 하는 것은 선 넘는 행위라는 걸 알았다. 고태빈은 이 일을 통해 서규영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서규영이 이 일에서도 타협한다면 그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 그가 뭘 하든, 어떤 요구를 하든 서규영은 절대 그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서규영은 곧장 차를 타고 산후조리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거의 10분 만에 미소 산후조리원에 도착했다. 미소 산후조리원은 도원시에서 가장 호화로운 산후조리원인데 그곳을 이용하려면 매달 8천만 원을 내야 했다. 아마 그 돈도 고태빈이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고태빈은 아내인 서규영에게 늘 야박하게 굴었다. 서규영은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고태빈과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규영은 고태빈이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자발적으로 모든 데이트 비용을 본인이 부담했었다. 그러다 딱 한 번, 고태빈과 데이트할 때 우연히 굉장히 좋아하던 빵집을 지나치게 된 서규영은 유리 너머 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태빈아, 나 치즈 케이크 사 줘.” 고태빈은 당시 쌀쌀맞게 말했다. “너 아까 밥 먹었잖아?” 아주 사소한 말 한 마디였지만 그 뒤로 서규영은 아주 오랫동안 고태빈에게 뭔가를 먼저 요구한 적이 없었다. 서규영이 요구한 적이 없으니 고태빈도 뭔가를 준 적이 없었다. 서규영은 어렸을 때부터 유복하게 자라 돈을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어차피 돈이 많으니 고태빈이 쪼잔하게 굴어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쪼잔했던 게 아니라 그냥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고, 빵 하나 사줄 정도의 애정조차 없었을 뿐이다. 가슴이 또 한 번 쥐어짜이는 것처럼 아팠다. 곧이어 서규영은 산후조리원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돌고 돌아 VIP룸에 도착했다. 서규영은 문 앞에 섰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부드러우면서도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윽, 아파...” 문틈 사이로 침대 위 검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는 예쁜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품 안에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여자는 이제 막 수유를 했는지 옷을 제대로 여미지 않아 가슴이 훤히 보였다. 여자에게서 등을 진 채로 창문 앞에 서서 바깥 경치를 보던 고태빈은 여자의 앓는 소리를 듣더니 서둘러 몸을 돌렸고, 마침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는 여자를 보게 되었다. 여자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황급히 옷을 여몄고 고태빈은 아무것도 못 본 척 몸을 돌렸다. 잠시 뒤 여자가 설명했다. “태빈 오빠, 아기가 나를 또 깨물었어.” 고태빈은 그제야 다시 몸을 돌렸다. 고태빈은 태연한 얼굴로 걸어가서 자연스럽게 침대 끄트머리에 앉더니 갓난아기를 안고 아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나쁜 아이네. 엄마를 아프게 하다니.” 고태빈은 애정 가득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문가를 바라보았을 때 마침 서규영의 싸늘한 시선을 보게 되었고, 그 순간 그의 얼굴에서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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