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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규영은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헛웃음을 쳤다. 그녀가 긁은 건 고태빈의 카드였기에 그녀가 돈을 쓸 때마다 고태빈의 휴대전화로 문자가 도착한다. 예전의 서규영에게는 밥 한 끼 먹는 데 백만 원이 드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태빈의 가정형편이 좋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가난해서 절약이 몸에 뱄다는 걸 알아서 결혼 후 고태빈이 자신의 카드를 건네며 마음껏 긁으라고 했을 때도 서규영은 그 카드로 단 한 번도 비싼 것을 사본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장을 보고 생활용품을 사는 것이 다였다. 그래서 그동안은 단 한 번도 돈을 쓰는 것 때문에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긴 적은 없었다. 고태빈은 명절이나 기념일 때 가끔 서규영에게 자기 카드로 에르메스 가방을 사라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그녀에게 가방을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면 일찌감치 본인이 직접 사서 선물했을 것이다. 서규영이 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서 말로만 통 큰 척 군 것이다. 고태빈이 박해은에게 몇억짜리 가방을 사준 걸 떠올린 서규영은 뭔가를 마음먹었다. 서규영은 고태빈에게 답장을 보내는 대신 곧장 백화점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럭셔리 브랜드 매장이 가득했다. 서규영은 망설임 없이 매장을 하나하나 돌면서 물건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가방, 옷, 뷰티 아이템, 가리는 것 없이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곳에는 주얼리 매장이 없었다. 쏟아지는 결제 내역 문자로 인해 고태빈의 휴대전화가 계속해 울렸다. 회의실에서 회의하고 있던 고태빈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서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규영은 익숙한 번호를 보고 곧장 전화를 끈 뒤 계속해 쇼핑했다. 그리고 5분도 되지 않아 결제하려고 보니 매장 직원이 카드가 정지되었다고 알렸다. 이미 예상한 일이다. 남자가 카드를 주면서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는 것은 상대방이 막 쓰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말로 마음껏 쓴다면 바로 태도를 바꾸며 권리를 거두어들인다. 서규영은 복수했다는 쾌감이 아닌 서글픔을 느꼈다. 결혼 전 서규영은 쇼핑하는 것을 좋아했고 예쁜 옷이나 주얼리를 사는 걸 좋아했다. 이 세상에 예쁜 걸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결혼 후 고태빈은 여자가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게 싫다고, 본인은 소박하고 단아해 보이는 여자가 좋다고 했다. 그래서 서규영은 그의 입맛에 맞춰 거의 꾸미지 않았고 심지어 예전에 샀던 명품 옷들과 주얼리들도 전부 멀리했다. 사실 고태빈은 화려한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서규영이 돈을 많이 쓰지 않기를 바란 것이었다. 오후쯤, 서규영은 종이백들을 잔뜩 들고 정민서의 로펌을 찾아갔다. 그녀는 자기가 산 것들을 전부 정민서의 사무실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선물이야.” 정민서는 깜짝 놀란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뭐야? 무슨 상황이야?” 서규영은 고태빈이 박해은을 해외로 유학 보내준 사실과 그녀에게 20억 가까이 퍼부어준 사실을 얘기했다. 정민서는 그 말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고태빈과 박해은을 욕한 뒤 말했다. “규영아, 박해은 그 여자 고소할 생각이 있으면 내가 사수한테 연락해서 이 사건 맡아달라고 할게. 우리 사수가 이 사건 맡으면 박해은 그 여자 그동안 쓴 돈들 다 토해내야 할 거야.” 서규영은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박해은은 알아서 돈 갚을 거야.” 박해은 얘기가 나오자 정민서는 뭔가 떠오른 듯이 말을 꺼냈다. “규영아, 박해은 그 여자를 조사해 보던 와중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어.” “뭔데?” “박씨 가문 장남은 박해은이 자기 딸인 줄 알고 키웠잖아. 그런데 박해은의 셋째 삼촌이 누구게?” 서규영은 무언가 짐작이 갔다. “박시형?” 서규영이 아는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박시형 한 명뿐이었다. 정민서는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박시형이야.” 서규영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흐릿한 실루엣이 떠올랐고 이내 그것은 점점 뚜렷해져 늘씬한 소년으로 뒤바뀌었다. 소년은 길고 날카로운 눈매에 웃을 때면 눈빛에 오만함이 가득했고, 오뚝한 콧대 아래 얇은 입술에는 늘 엷은 조롱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이 세상 그 무엇도 그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소년은 항상 똑같은 스타일의 흰 셔츠를 입고 다녔고 가장 위쪽 단추 두 개는 언제나 풀어헤쳤다. 그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 서규영의 앞에 나타나 그녀를 놀라게 했고,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서규영이 자신을 나무라기를 기다렸다. 학창 시절, 박시형은 서규영과 완전히 앙숙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인정받는 과학기술 천재였다. 비록 같은 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고, 나이도 박시형이 그녀보다 한 살 더 많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자주 마주쳤다. 그리고 의견이 달라 부딪치는 일들이 많았다. 서로를 싫어하는데도 두 사람은 늘 운명의 장난처럼 같은 프로젝트를 맡았다. 서규영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박시형은 나보다 겨우 한 살 더 많을 뿐이야. 그런데 박해은의 셋째 삼촌이라고?” “너 박시형이랑 그렇게 오랫동안 앙숙으로 지냈으면서 박시형이 델포이 그룹 아들이란 사실도 몰랐었어? 박씨 가문에는 아들 셋에 딸 하나 있는데 박시형이 막내고 위로 형 둘, 누나 한 명 있어. 그런데 박시형이 가장 똑똑해. 천재라서 스무 살 때 회사를 물려받았지.” “델포이는 박시형이 물려받기 전에도 이미 상당한 규모의 대기업이었는데 박시형이 물려받은 뒤에는 규모가 그때보다 몇 배는 더 커졌어. 특히 휴대전화랑 자동차 제조업에서는 아마 업계 최고일 거야.” 델포이 그룹은 서규영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박시형과 델포이 그룹을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박시형과 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때 함께 국가 반도체 연구소 청소년 비밀 육성 프로젝트인 드래곤 스케일 플랜에 참여했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무 접점이 없었다. 서규영은 걸핏하면 박시형과 싸웠던 나날들을 떠올리고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역시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은 없다니까.” 서규영은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정민서와 함께 저녁을 먹은 뒤 그녀는 멜밸리로 돌아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고나율이 장경희에게 불평하는 게 들렸다. “오늘 새언니가 도시락을 가져다주지 않아서 학교 문 앞에서 30분이나 기다렸다니까요. 새언니는 내가 새언니처럼 한가한 줄 아나 봐요. 고3에게는 1분 1초가 소중하다고요.” 예전이었다면 서규영은 그 말을 듣고 서운해했을 것이다. 고나율은 고3이 된 이후로 학교 학식이 별로라고 했고 서규영은 그 뒤로 매일 점심마다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매일 국 하나에 세 가지 반찬을 준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주일 내내 메뉴가 달랐다. 심지어 음식을 만들 때면 맛과 영양을 모두 고려했다. 그러나 고나율은 그녀의 정성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모든 걸 당연하다고 여겼다. 서규영은 이제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나율의 말을 듣고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예전에 장경희와 고나율에게 잘해준 이유는 고태빈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서규영은 고나율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고 매일 숙제를 도와주고 그녀를 대신해 각종 문제까지 해결해 주었는데 고나율은 고마워하지 않고 오히려 서규영이 너무 엄격하게 굴고 자신의 자유를 억압한다면서 서규영을 원망했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 신경 안 쓰면 되지.’ 장경희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걔 오늘 갑자기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 같아. 아침에는 네 오빠랑 한바탕 싸우더니 나한테까지 지랄하더라니까. 애도 못 낳으면서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모르겠어. 네 오빠 돌아오면 제대로 혼쭐내라고 말해둘 거야.” 고나율은 아직 학생이었는데 장경희는 그녀에게 뭐든 얘기했다. 그래서 고나율도 서규영과 고태빈의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오빠랑 결혼한 지 3년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임신을 못 하니 오빠가 해은 언니를 더 좋아하죠. 해은 언니는 예쁜 데다가 다정하고 심지어 명문대 석사일 뿐만 아니라 오빠를 위해 아들까지 낳아줬잖아요. 이제 곧 저한테 새로운 새언니가 생기겠어요.” 서규영이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두 모녀는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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