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서규영은 고태빈이 말을 마치자마자 아주 덤덤히 말했다.
고태빈이 무릎을 꿇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고태빈은 넋이 나갔다.
‘어떻게 나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할 수 있어?’
고태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전 재산을 걸어 판을 뒤엎으려던 도박꾼이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패배하여 모든 걸 잃어버린 듯이 말이다.
고태빈은 벼랑 끝으로 몰린 사람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난감하기도 하고, 굴욕적이기도 해서 옴짝달싹 못 했다.
그렇게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고태빈과 박해은은 아주 큰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날 선 눈빛으로 서규영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서규영을 찢어 죽일 기세였다.
서규영은 고태빈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 고태빈 씨, 왜 무릎을 꿇지 않는 거예요? 아까는 그냥 해본 말이었나요? 아니면 제가 마음 약한 사람이라 고태빈 씨를 무릎 꿇리지 못할 줄 알았나요?”
그 말은 지금의 고태빈뿐만 아니라 지난 3년간 자신과 함께 결혼생활을 해왔던 남편 고태빈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동안 고태빈은 서규영의 선함과 인내심, 용서와 넓은 아량을 수도 없이 이용했다.
고태빈은 서규영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할 때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둘 중 한 명은 가정에 최선을 다해야지. 설마 남자인 내가 집안 살림을 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
장경희가 그녀를 괴롭힐 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잖아.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네가 조금 더 참아.”
고나율이 심하게 반항하며 사고를 칠 때는 이렇게 말했다.
“나율이는 내 여동생이지만 네 여동생이기도 하잖아. 그러니까 나율이한테 신경 좀 많이 써줘.”
서규영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매번 양보했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았다. 고태빈은 서규영이 양보할 거라고 굳게 믿고 설쳐댔다.
서규영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저런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지난 10년간 그녀가 수도 없이 참아주고 양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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