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그래요...”
손태하는 눈앞의 낯선 여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딱히 이유를 짚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손태하 씨예요?”
“네, 맞아요.”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말을 선뜻 믿지 않는 눈치였다.
손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결혼식 날 민 회장의 비서가 건네준 가족관계증명서였다.
“믿기지 않는다면 이거 보세요...”
“정말 결혼했네요. 다행이네요. 축하합니다.”
서류를 한참 들여다보던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 굳어 있던 눈빛을 조금 풀었다.
“잘 됐지 뭐...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
그 말이 귀에 들어오자, 손태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우리가 결혼했든 말든, 그게 왜 그쪽이 안심 거리죠? 지유 씨랑 무슨 사이야 도대체.’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민혜원이에요.”
“아, 민혜원 씨...”
손태하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알았다고 해도 양지유와 이 여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병상으로 다가가 양지유의 손을 꼭 잡았다.
“여보, 민혜원 씨라는 분이 보러 왔어.”
그는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
양지유가 전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손태하의 손가락을 꽉 움켜잡았다.
그녀는 ‘민혜원’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눈에 띄게 반응했다.
“왜 그래, 여보? 민혜원 씨한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손태하는 조심스럽게 물으며 옆에 서 있던 민혜원을 힐끗 바라봤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민혜원이랑 지유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지? 원한이라도 있었던 건가?’
손태하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 민혜원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병상 가까이 다가와 몸을 숙였다.
“유야, 결혼 축하해. 남편 정말 잘생겼더라...”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예전에 내가 잘못했던 거... 미안해. 너도 이제 가정을 꾸렸으니 꼭 건강하게 일어나길 바랄게. 오늘 여기 온 건 결혼 소식 듣고 한 번 보고 싶어서야. 정말이야. 남편도 참 젊고 멋진 것 같아. 다시 한번 축하해. 그럼... 난 이만 갈게.”
그 말을 끝으로 민혜원이 천천히 일어섰고 손태하는 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양지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마치 눈을 뜨기라도 하려는 듯한 미세한 움직임이었고 그녀의 손에서 전해지는 힘도 확실히 더 세졌다.
“또각또각...”
민혜원의 구두 소리가 병실에 조용히 울렸다.
그녀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태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여보... 아까 민혜원 씨가 다녀갔어. 그 사람... 혹시 당신 친구였던 거야?”
손태하는 그녀의 말투에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굳이 미안하단 말은 꺼내지 않았겠지.’
“조급해하지 마, 자기야. 눈 뜨면... 우리 같이 그 사람 찾아가자. 그래, 우리 같이 가자.”
떨리는 눈꺼풀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깨어나고 싶어 하는지 느껴졌다.
손태하는 그런 양지유를 다정히 달래며 조심스레 볼을 쓸어내렸다.
“여보, 그래도 얼굴은 당신이 훨씬 예뻐. 성격은 뭐... 순해 보이긴 하더라. 근데 혹시 그 사람 예전에 당신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아무리 봐도 나쁜 사람 같진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 사이에는 뭔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다만 그게 뭔지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직 그 일들이 끝나지 않은 걸지도 몰라...’
“자기야... 자기가 곧 일어날 것만 같아서 너무 기뻐...”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다 천천히 손을 내려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눈꺼풀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불안을 잠재운 듯했다.
...
시간은 조금씩 흘러 어느덧 저녁 여섯 시가 되었다. 손태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양지유를 바라보았다.
“자기야, 나 먼저 학교에 좀 다녀올게. 내일 오전에 이사라서 아마 좀 늦게 올 것 같아. 나 너무 보고 싶어 하지 말고... 알았지?”
그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코끝을 살짝 톡 건드리고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끼익...”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 선생님, 아까 지유 눈꺼풀이 한참 움직이다 말았어요. 아직 눈은 못 떴지만요.”
“정말요?”
“네. 그리고 손을 잡는 힘도 훨씬 세졌어요. 왠지... 지금이라도 금방 깨어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좋은 신호네요. 바로 주치의 선생님께 말씀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간호사는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런 사람이 내 남자친구면 얼마나 좋을까... 인내심 있고 말도 참 따뜻하고...”
간호사는 손태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에 별빛이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을 나와 버스를 탄 손태하는 창밖으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봤다.
‘벌써 졸업이라니... 4년을 몸담았던 학교를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되다니.’
하지만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건 사회생활도 남은 학업도 아니었다.
지금 그의 안에 있는 건 점점 생기를 되찾아가고 있는 양지유였다.
처음에는 단지 계약이었고 연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양지유가 그의 삶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결혼한 날부터 어느새 반달이 지났고 그녀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석 달을 버티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정말로 완전히 회복될 가능성이 생긴 걸지도...’
...
“띠리리링...”
막 기숙사로 들어선 손태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민 회장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누님, 무슨 일이세요?”
“태하 씨, 이제 곧 졸업이죠?”
“네, 누님. 이제 곧 졸업이에요. 내일 기숙사 정리하고 이사 갈 예정입니다.”
“그래요... 지금은 어디 살고 있어요? 혹시 집 구하는 거 불편하면 내가 좀 도와줄까요?”
“괜찮습니다, 누님. 병원 근처에 친구랑 월세방 하나 구했어요. 둘이 살기에는 충분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태하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계약 바깥의 일까지 신세 지는 건 아무래도 불편했다. 그래서 분명한 태도로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그 너머에 민 회장의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