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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그래도 월세방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내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겠어요? 마침 지유네 집 열쇠가 나한테 있는데... 집도 비어 있고 차도 그대로 있어요. 어차피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잖아요. 그 집에서 지내보는 건 어때요?” 민 회장은 말을 건넬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누님. 지유 씨가 살아 있는 한 저는 계속 병원에 찾아갈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손태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늘도 다녀왔습니다. 상태가 꽤 괜찮았어요. 눈꺼풀이 한참 움직이더라고요. 언제라도 눈을 뜰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는 민 회장의 제안을 다시 한번 정중히 거절했다. 날마다 병원을 찾고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그는 책임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 사이였고 양지유는 그의 아내였기에 곁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다만 돈이나 물질적인 도움만은 선을 긋고 싶었다. 그 어떤 것도 민 회장의 호의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 얘기 들었어요. 주치의 선생님한테서 들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태하 씨.” 민 회장은 말을 멈춘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태하 씨는 정말 탐이 나는 청년이네요... 우리 지유가 태하 씨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요...” 그 말에는 고마움과 함께 짙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손태하와 윤재형은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본격적으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약해 둔 소형 밴도 곧 도착했다. 짐을 옮기고 새집 정리까지 마쳤을 때쯤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야, 태하야. 우리 이제 딱 졸업도 했고 짐도 다 옮겼고... 축하 겸 한잔 어때?” 졸업도 했고 일자리도 생겼고 이제 보금자리까지 마련됐으니 어떻게든 축하할 만한 분위기였다. “헉, 벌써 열한 시야?” 손태하는 땀을 닦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했던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는 순간 뭔가를 떠올린 듯 표정을 바꿨다. “재형아, 미안. 나 병원에 좀 다녀와야겠어. 점심 먹을 시간이 없네...” “아, 괜찮아. 가 봐. 여긴 아파트 앞에 식당 많더라. 난 여기서 혼자 해결할게.” “하하, 그래. 맛있는 거 먹어.” 손태하는 웃으며 말한 뒤 급히 안방 쪽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확인하고 옷매무시를 정돈했다. 잠시 후 그는 윤재형과 함께 집을 나섰다. ... 점심도 거르다시피 한 채, 손태하는 서둘러 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왜 그리 마음이 급한지는 스스로도 잘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양지유를 보고 싶었고 그녀의 곁에서 한 마디라도 더 건네고 싶었다. ‘정말 정이라도 생겨버린 걸까? 아니면 4억 원 때문일까...’ 하늘 아파트에서 병원까지는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지나 병원에 도착했다. 병실 안으로 들어선 손태하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앉았고 그녀의 작은 손을 살며시 잡았다. “어?” 그녀의 작은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고 얼굴에도 전에 없던 혈기가 감돌았다. 손태하는 놀란 마음에 무의식중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만졌다. ‘확실히 따뜻해졌어. 손도 얼굴도 전보다 훨씬 따뜻한데?’ “여보...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거야?” 손태하는 병실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병실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면 의료진도 이미 눈치챘겠지? 체온을 측정할 때 분명 알아챘을 거야...’ “끼익...”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들어섰다. “간호사 선생님, 제 아내가...” “보호자분, 혹시 눈치채셨나요?” 간호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활짝 웃었다. “손이랑 얼굴이 조금 따뜻해진 것 같아서요. 설마 열이 나는 건 아니겠죠?” 그 말에 간호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발열은 없어요. 체온은 계속 측정하고 있거든요. 다 정상 범위예요.” 잠시 말을 멈춘 간호사는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보호자분, 좋은 소식이 있어요. 오늘 오전에 환자분이 잠깐 눈을 떴었거든요. 저희가 죽을 드렸는데 꽤 많이 드셨거든요.” “네? 정말요?” 손태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양지유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거야? 눈을 떴다고? 식사도 했다고? 그렇다면 정말 3개월, 아니 그 이상도 버텨낼 수 있겠는데?’ “간호사 선생님, 이대로면 금방 회복되겠죠?” “그럴 가능성이 크죠. 지금처럼 눈을 뜨고 식사도 잘하시면 머지않아 일반 병실로 옮기실 수 있을 거예요.” “정말 다행이네요...” 손태하의 얼굴에 진심 어린 안도감이 번졌다. 그의 가슴 한편에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기적이라는 게... 정말 일어나긴 하는구나.’ 간호사는 환자의 상태를 간단히 점검한 뒤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 오셨을 땐 솔직히 상태가 아주 위중했어요. 그땐 거의 깊은 혼수상태였고요. 그동안은 비타민 수액 등 영양 수액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던 거예요.” 간호사는 안정원 교수의 말을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안 교수님 말씀으론... 환자분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마음만 되돌릴 수 있다면 충분히 회복 가능하다고 하셨어요.” “그렇군요...” 손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예전에도 들었던 말이지만 오늘따라 그 말이 가슴 깊이 박히는 듯했다. ‘이렇게 예쁘고 성숙한 사람이... 어쩌다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걸까. 도대체 어떤 상처를 받았기에...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기에...’ “그럼 두 분 계속 이야기 나누세요. 방해 안 할게요.” 간호사는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는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 “여보...” 손태하는 양지유의 손끝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그런데도 괜히 마음 한쪽이 조마조마했다. ‘큰일인데... 혹시라도 갑자기 눈 뜨는 거 아니겠지? 여보, 자기, 온갖 낯부끄러운 말을 다 했는데... 다 듣고 있었던 거라면? 자기가 유부녀가 됐다는 건 알고 있으려나? 스물두 살밖에 안 된 애송이가 여보라고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다시 기절하면?’ 그는 괜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보, 내 목소리 들려? 들리면 손 한 번 꼭 잡아줄 수 있겠어?” 손태하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양지유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기야...” “지유야...” 점점 더 부드러워지던 그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살짝 섞여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뭐지... 볼이 더 따뜻해졌네? 홍조까지?’ 그 순간이었다. 양지유의 손이 갑자기 움찔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 순간뿐이었고 다시 잠잠해졌다. “자기야, 아까 간호사 선생님한테서 들었어. 오늘 아침에 잠깐 눈을 떴다며? 죽도 꽤 먹었다고 하더라. 그 얘기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지유야, 너만 괜찮다면 내가 매일 맛있는 거 해줄게. 그리고 그거 알아? 내가 지금까지 본 여자들 중에... 진짜 네가 제일 예뻐. 진심이야. 절대 거짓말 아니야.” 그 말을 하던 순간 양지유가 천천히 손태하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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