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손태하는 양지유가 더는 그를 밀어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며칠 동안 곁에 머물며 말을 걸고 손을 잡아준 덕분인지 그녀는 어느새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 듯했다.
점심시간은 늘 짧았고 그는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채 다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손태하는 양지유의 손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보, 나 이제 가야 해. 오후 1시까지 출근해야 해서... 이제 막 회사 들어갔는데 지각하면 안 되잖아.”
그는 잠시 양지유를 바라보다가 몸을 숙여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왼쪽에 한 번, 오른쪽에 또 한 번.
“쪽.”
양지유는 짧고 여린 숨소리를 냈다.
“읏...”
그녀의 뺨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손태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 여보, 오늘 저녁에 또 올게.”
그는 그녀의 손을 천천히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음 한쪽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회사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정확히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자리로 막 돌아와 앉자, 윤재형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태하야, 나 점심에 구내식당에서 예쁜 누나 한 명한테 말 걸었거든? 와, 진짜 예쁘더라.”
“오, 대단한데? 첫 출근 날부터 번호 따기냐?”
“그럼! 내 실력을 어디 가겠어? 태하야, 너 정도 되는 조건이면 우리 회사에서 여자친구 만드는 거 진짜 식은 죽 먹기야.”
윤재형은 신이 난 표정으로 손태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눈빛에는 장난기와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손태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지영이 일은? 괜찮아졌냐?”
“하... 4억 원짜리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려고. 속상해도 어쩔 수 없지. 마음 정리에는 관심 돌릴 대상을 찾는 게 최고지. 간단하게 말하면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들면 돼.”
“정말 대단한 발상이야...”
손태하는 윤재형을 바라보다가 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세상에 여자는 많아. 안 되면 다른 사람 만나면 되는 거니까.’
그때 실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재형 씨, 대회의실 좀 다녀와요. 대표님 회의하시는데 프로젝터 연결 테스트를 해야 해요.”
“네, 실장님.”
윤재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실장은 손태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태하 씨는 디자인팀 쪽으로 가봐요. 강 실장님이 좀 보자고 하시던데.”
“네? 무슨 일로... 컴퓨터가 고장 났나요?”
손태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실장이 웃으며 손태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좋은 일일 거예요. 가보면 알아요.”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실장의 표정만 봐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실장이 일까지 맡겼으니, 손태하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자리를 떠나 5층 디자인팀 사무실로 향했다.
강소연 실장의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고 손태하는 문 앞에서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강 실장님, 호출받고 왔습니다.”
강소연은 손태하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왔어요? 들어와요. 앉아요.”
“감사합니다, 강 실장님.”
손태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속으로는 그녀의 미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진짜 예쁘긴 예쁘다. 얼굴도, 분위기도, 몸매도...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네.’
그가 자리에 앉자, 강소연이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뭘 그렇게 예의 차려요. 이제 얼굴 몇 번 본 사이인데... 앞으로 편하게 지내요. 나도 가끔은 말 편하게 할게요.”
손태하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좀 편해진 것도 같았다.
“실장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강소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태하 씨, 내가 태하 씨보다 나이는 조금 더 많잖아요? 앞으로는 소연 누나’라고 불러도 괜찮고... 그냥 ‘누나’라고 해도 좋아요.”
“어... 네, 알겠어요. 누나.”
그녀가 먼저 그렇게 제안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좋잖아. 하하... 내가 태하 씨를 부른 이유는 우리 디자인팀 촬영에 남자 모델이 필요해서예요. 태하 씨가 모델 좀 해주면 좋겠는데...”
손태하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강소연이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시간 맞춰서 잠깐만 도와주면 되고... 당연히 페이도 두둑이 챙겨드릴 거예요.외부에서 모델 섭외하면 시간도 돈도 꽤 많이 들거든. 근데 태하 씨는 얼굴도 잘생기고 체형도 완전 우리가 원하는 모델이라니까, 딱 맞아.”
“페이도 있어요?”
손태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괜찮은 알바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럼. 두둑하게 챙겨줄 거라니까? 누나가 괜히 부른 게 아니야...”
강소연의 눈빛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분이 묻어 있었다.
그게 단순한 호의인지, 호감인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쁘진 않았다.
“좋아요, 고마워요. 누나.”
“고마울 것까진 없고... 앞으로 또 이런 기회 생기면 누나가 제일 먼저 우리 동생부터 떠올릴게.”
“네, 잘 부탁드릴게요. 누나.”
사람 인연은 많을수록 좋다더니, 강소연의 도움은 이상하게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외모가 출중하다는 건 손태하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모델 제안을 받은 게 그리 뜬금없는 일도 아니었다.
예전에도 친구 부탁으로 가끔 데이트 흉내를 내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외모 덕을 봤다는 걸 부정하긴 어려웠다.
“좋아, 태하 씨. 오늘 얘기할 건 여기까지. 내 제안을 수락했으니까, 이제 좋은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네. 난 곧 회의 들어가야 하니 이만 돌아가도 좋아. 위에서 예산 승인만 떨어지면 바로 준비 들어갈 거야. 그때 다시 연락할게.”
“네, 알겠습니다. 누나.”
손태하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아, 누나. 그런데요... 우리 회사 대표님, 아프시다는 말 들었는데... 진짜예요?”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말 같았다.
강소연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 얘긴... 나중에 누나가 시간 있을 때 알려줄게. 너무 걱정하진 말고. 당장 태하 씨한텐 별 영향 없을 거야.”
“아, 네. 그러면 연락 기다릴게요. 누나.”
손태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자, 복도 곳곳에서 스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여직원들의 눈길이 은근히 그에게 쏠려 있었고 그게 간질간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진짜 스타일 좋은 사람들 많긴 하네... 시선 집중되니까 오히려 민망할 정도잖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잠시 뒤 윤재형도 자리로 복귀했다.
“테스트는 끝났냐?”
“아이, 그냥 프로젝터 연결만 하면 되는 거였어. 별거 아니야.”
윤재형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근데 말이야, 태하야. 나 아까 회의실 근처에서 어떤 어르신 한 분을 뵀는데, 사람들이 다들 ‘민 회장님’이라고 부르더라? 연세 좀 있어 보이던데... 혹시 우리 회사 회장인가?”
“어... 뭐라고?”
손태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에 단번에 떠오른 사람은 그에게 1억을 내밀며 ‘계약 결혼’을 제안을 했던 민 회장이었다.
그녀 역시 예순쯤 되어 보였고 아랫사람들에게 ‘민 회장님’이라고 불렸다.
‘설마... 같은 분이겠어?’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겠지. 이렇게 큰 강성에서 그런 영화 같은 우연이 있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