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눈살을 찌푸린 진소희는 외면하려 했지만 그녀가 막 떠나려는 순간 주유린이 그녀를 막아섰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예약 없이는 들어가실 수 없어요.”
주유린은 표정 관리를 하며 완벽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에 담긴 적의와 우월감은 진소희의 눈에 훤히 드러나 보였다.
진소희의 얼굴빛이 차갑게 식었다.
“주유린 씨, 회사에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정말 저를 막을 건가요?”
주유린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 짙어졌다.
“흥, 사모님이면 어쩔 건데요? 아이도 낳지 못하잖아요. 3년이란 시간을 줬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불임을 유발하는 약은 맛이 어땠나요?”
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소희의 손바닥이 주유린의 뺨을 강타했다.
“입이 이렇게 더러운데, 어떻게 프런트 직원이 된 거죠?”
“진소희 씨, 앞날은 자기 손에 달렸어요. 오늘은 여기 들어갈 생각 하지 마세요. 경비원!”
경비원이 오기도 전에 고준서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가 가까이에 다가오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주유린, 너 직원 수칙 잊었어? 첫 조항에 누구를 막고 누구를 통과시켜야 하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았어? 잘할 수 있으면 하고 못 하겠으면 당장 그만둬!”
말을 끝내자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소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희야,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밖에 비가 오는데, 왜 이렇게 옷을 얇게 입고 나온 거야? 몸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잖아.”
고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진소희에게 왜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느냐고 꾸짖는듯한 표정이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주유린의 눈빛은 질투와 증오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 없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진소희 역시 아무 말 없이 고준서의 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을 멈춘 뒤 눈가가 붉어졌다.
“고준서, 네 배려는 사람을 정말 감동하게 해. 하지만 이렇게 연기 할 필요가 있어?”
그가 그녀를 감싸안으려 하자 그녀는 몸을 살짝 비켜 그 손길을 피해 버렸다. 그러고는 먼저 발걸음을 내디뎠다.
“괜찮아, 올라가자.”
그러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지만 고준서는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소희야, 나 협력사와 오후에 논의할 업무가 있어. 너 먼저 사무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일 끝나면 바로 올게. 알겠지?”
‘또 기다리라네. 이번에는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진소희의 가슴속에서 순간 수많은 질문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결국 모두 무력함으로 바뀌며 그저 평온하기 그지없는 한마디 대답만이 입가를 스쳤다.
“응.”
고준서는 그녀가 오늘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에 약간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아이를 잃어버린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라 여기며 다정하게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몸을 돌려 떠났다.
그러나 진소희가 한참 동안 기다려도 엘리베이터는 올라가지 않았다. 다시 층수 버튼을 눌렀지만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고준서가 엘리베이터 카드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진소희는 다시 로비로 나와 그에게 비서를 보내달라고 메시지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엘리베이터 문을 나서는 순간 옆 비상계단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났어? 내가 소희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했잖아. 왜 말 안 듣는 거야?”
“흥, 질투 나잖아. 그리고 진소희 씨가 나를 먼저 때렸어. 너무 아프단 말이야. 어떻게 보상 해줄 거야?”
고준서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내뱉은 그 애정이 어린 어조는 마치 얼음송곳이 되어 진소희의 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내 평생을 너에게 바치는 걸로 보상해 주는 건 어때? 그리고 우리 축구팀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아이를 많이 낳자.”
주유린이 웃으며 싫다고 말하자 고준서도 웃으며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진소희는 어둠 속에 서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심연으로 추락한 지 오래였다.
고준서의 그 말은 너무나 익숙했다. 그녀를 잃었다가 되찾은 뒤 결혼식에서 그녀의 마음을 수없이 떨리게 했던 그 말이었다.
그녀는 영원히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권력 있는 고씨 가문의 수장이 수많은 거물 앞에서 비굴할 만큼 낮은 자세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목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었다.
“소희야, 사주가가 정해준 사랑의 서약서에는 내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상대를 사랑해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어. 내 평생을 너한테 바칠게, 너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어?”
그때 온몸을 떨며 울고 있던 고준서는 반지조차 제대로 쥐고 있지 못했다.
그는 빈 말로 약속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사랑은 생을 마감하는 그날에 결론이 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겨우 삼 년 만에 그는 다른 여자를 위해 수없이 그녀를 외면했다.
진소희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이 그대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준서, 네 마지막 결론이란 게 참 한심하구나.’
은밀하게 뒤엉킨 그들의 소리가 점점 커지자 단호하게 몸을 돌린 진소희는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비서가 그녀를 데리고 올라왔다. 이번에는 해가 지기 전에 고준서가 마침내 돌아왔다.
고준서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진소희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뭘 들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