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최재현은 말 한마디 없이 팔을 툭 떨어뜨렸다.
정수아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팔짱을 끼었다.
“오빠, 많이 힘들어? 내가 늦었지. 오늘 밤은 내가 오빠랑 예진이 챙길게.”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정서연의 얼어붙은 표정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최재현은 정서연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아렸지만, 더 큰 감정은 짜증이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눈살만 찌푸려도 달려와 왜 그러냐고 물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을까.
“괜찮아.”
두 글자를 내뱉은 그는 시선을 차갑게 거두었다.
“엄마 노릇하기 싫으면 여기서 얼쩡대지 마.”
그에게 정서연이 벌이는 일련의 행동은 관심을 끌기 위한 얄팍한 수작일 뿐이었다.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정수아가 미소를 그렸다.
“언니, 늘 좋은 아내에 좋은 엄마였잖아. 나는 언니가 그런 사람 아니라고 생각해.”
두 사람은 한목소리로 정서연의 침착한 얼굴을 찢어 내려 미쳐 날뛰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서연은 입도 뻥끗하지 않고 옆으로 비켜 지나갔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곧장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무시당한 최재현은 숨이 턱 막히며 얼굴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본 정수아가 자책하듯 말했다.
“언니가 나 보고 기분이 상했나 봐. 근데 나 오빠랑 예진이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너무 걱정이 돼서 안 올 수가 없었어.”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고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정신을 추슬러 내린 최재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 탓 아냐. 정서연이 괜히 예민하고 속 좁을 뿐이야. 예진이도 그런 엄마 싫어해.”
조용한 복도에는 낮은 목소리조차 또렷이 울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정서연의 귀에 들어왔다. 펜을 쥔 손이 멈추며 잉크가 처방전에 번졌다.
간호사가 얼른 새 처방전을 출력해 그녀의 앞에 살포시 두며 속삭였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따님은 제가 특별히 신경 쓸게요.”
정서연은 약 목록을 다시 확인하고 서명했다.
“고마워요.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남편분 처방전도 보실래요?”
“괜찮아요.”
그녀는 펜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약 변경은 제가 유닥한테 직접 말할게요. 수고하세요.”
최예진은 아직 어린아이니 아프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최재현이 어떻게 되든 이제 그녀와는 상관없었다.
응급실에서 내려와 병원 정문을 나서자 날 선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급히 나오느라 얇은 재킷을 잘못 걸쳤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앞에 멈추고 박경희가 내려 다급히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수아가 갑자기 병원에 간다길래 걱정돼서 따라왔어. 예진이는 괜찮니?”
정서연은 오후의 상황이 스쳐 가며 눈빛이 싸늘해졌다.
“위장염이에요.”
“너 애 엄마 맞니? 그렇게 작은 애가 위장염이라니! 애 곁도 안 지키고 어디 가려고?”
끝없는 꾸지람에 정서연은 헛웃음을 삼켰다.
“엄마야말로 어떤 엄마였죠? 지금 이 사단이 전부 제 탓만은 아닐 텐데요.”
말이 끝나자마자 정태석이 버럭 소리쳤다.
“네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그는 손을 번쩍 들어 정서연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미처 피할 틈이 없어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가리기만 했는데, 예상한 통증 대신 익숙한 체취가 스며들었다.
우뚝 선 남자가 그녀를 가렸다. 고개를 들자 최재현이었다.
그는 정태석의 팔을 막았다.
“예진이 깼어요. 수아가 위에서 돌보고 있으니 올라가시죠.”
정태석은 불쾌한 듯 손을 내리고 말없이 아내를 데리고 올라갔다.
한 걸음 물러난 정서연의 팔을 최재현이 움켜잡았다.
“너는 엄마로도 최악이고, 딸로도 최악이야. 어디 하나 수아보다 나은 구석이 없어.”
서늘한 한마디가 심장을 깊이 찔렀다. 그에게는 아내로서조차 정수아보다 못한 모양이다.
정서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짙은 눈동자를 노려봤다.
“내가 못 하면 정수아를 데려가서 대신하면 되잖아. 이혼협의서에 도장만 찍으면 끝이라니까.”
“너를 대신해?”
최재현이 피식 비웃었다.
“너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네. 알았어, 후회나 하지 마.”
그 말을 듣자 정서연의 눈빛에 담겼던 얼음 같은 기색이 조금 사그라졌다.
최재현은 그녀가 곧 고집을 꺾을 거라 생각했으나 틈을 주지 않고 돌아섰다.
“최재현.”
역시 뒤에서 그녀가 불렀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멈춰 섰다.
“이번에는 사과해도 소용없어.”
정서연은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예진이는 네 아이이기도 해. 이번에는 제대로 챙겨. 맨날 이상한 거 먹이지 말고.”
그 말에 최재현은 굳어 버렸다.
‘할 말이 고작 이거였나?’
홱 돌아봤을 때 정서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병원 출입문을 노려봤다.
다음 날 아침, 희미하게 동이 트자 소아병동에서 호출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간호사가 장비를 들고 뛰어 들어가 보니 어린 소녀가 토를 멈추지 못했고 끝내 노란 담즙까지 쏟아냈다.
보호자 침대에서 자던 정수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혼란스러운 광경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간호사의 목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정 선생님 호출해! 아드님 상태가 악화했어!”
그 소리에 정수아는 정신이 번쩍 들어 최예진의 곁으로 달려갔다.
“예진아, 왜 그래?”
실제로 아이가 걱정되어서라기보다, 정서연에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호사는 그녀를 노려봤다.
“애를 어떻게 돌본 거예요? 벨도 애가 직접 눌렀잖아요!”
정수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가 도우미도 아닌데...”
변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최재현이 보이자 그녀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전부 제 잘못이에요. 잠깐 눈 붙였는데 이렇게 될 줄은...”
“비켜요, 방해돼요!”
간호사가 다급히 외쳤다. 그녀는 또 고개를 들어 문 쪽을 확인했다.
“정 선생님 아직인가요?”
최재현은 깊게 찌푸린 미간으로 물었다.
“예진이 왜 이러죠? 저는 애 아빠입니다.”
“뭐 잘못 먹은 것 같아요. 그래서 증세가 심해졌어요.”
간호사의 말에 그는 정수아를 돌아봤다.
“도우미는?”
정수아는 입술을 깨문 채 제자리에 서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젯밤 최예진과 단둘이 있고 싶어서 도우미를 돌려보내고, 아이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이스크림 바를 건넨 사실을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