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너희들 꼴이 하도 우스워서 안 웃을 수가 있어야지.”
정서연은 앞을 가로막던 몇 사람을 밀치고 병상으로 다가가 최예진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최예진은 언제 깼는지 울지도 짜증도 내지 않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큰 눈으로 정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이모를 탓하지 말아 줘. 이모를 감옥에 보내지 말아 줘. 예진이 말 잘 들을게. 울지도 떼쓰지도 않을게. 치킨도 안 먹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모를 풀어줘.”
최재현과 양가 부모의 수많은 말도 딸의 한마디를 이기지 못했다.
정서연의 마음은 단숨에 얼음처럼 차가워져서 깊은 동굴에 갇힌 듯했다. 딸이 깨어나서 가장 먼저 꺼낸 말이 정수아를 변호하는 부탁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예진아, 이런 일로 마음 쓰지 마. 네 몸이 다 나으면 엄마가...”
“엄마!”
최예진이 외쳤다.
“왜 이모랑 자꾸 싸우려고 해? 왜 이모를 싫어해? 이모는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왜 꼭 쫓아내려고 해? 어젯밤에 이모가 밤새 나를 돌봐 줬잖아. 내가 엄마가 가장 필요할 때 곁에 있던 건 이모랑 아빠였어. 이모는 절대 나를 해치지 않아.”
정서연은 멍하니 딸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아이처럼 낯설었다.
그때 보안요원이 들어왔고, 눈치를 챈 간호사가 정태석과 박경희 부부를 밖으로 내보냈다. 두 사람은 문밖에서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놀란 최예진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네가 제멋대로 구는 건 둘째 치고, 이제 딸까지 외면할 거야?”
최재현이 따졌다.
정서연은 시선을 거두고 일어나 산산조각 난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정수아를 풀어줄 수도 있어.”
그녀는 병상에서 등을 돌린 채 낮게 말했다.
“최재현, 네가 이혼협의서에 서명하면 바로 병원에 신고 취소하라고 할게.”
딸마저 자기 편이 아니라면 더 싸울 이유가 없다는 허망함이 밀려왔다.
최재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서연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어 나갔고, 그때 뒤에서 들려온 최예진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잘됐다! 아빠, 아빠는 이모랑 결혼해 줄 거죠?”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지만 정서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하루, 그녀는 골치 아픈 일들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아이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병상에 누운 딸의 얼굴이 불현듯 떠오르곤 했지만 곧 사라졌다. 지금 최예진에게 필요한 건 자신이 아니었다.
경찰서.
정수아는 조사실에서 울먹이며 호소했다.
“저 정말 그런 짓 안 했어요.”
경찰은 지친 듯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그녀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유치장에 넣어 둡시다.”
증거가 없으면 최대 이틀 후에는 풀려난다. 경찰에게는 마지막 증거 수집 시간이지만, 정수아에게는 48년보다 길게 느껴질 이틀이었다.
얼마 뒤 경찰이 다시 왔다.
“이제 나가도 됩니다. 병원도 더는 책임을 묻지 않겠답니다. 나가셔도 됩니다.”
정수아는 안도하며 유치장을 나왔다. 부모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엄마, 언니가 왜 저를 모함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우리 딸, 고생했지. 걱정하지 마라. 재현이랑 예진이가 서연이를 설득했대. 다시는 신고 안 할 거야.”
박경희가 그녀를 다독였다.
집으로 가는 길, 박경희가 말했다.
“듣자 하니 재현이가 이혼해 주겠다고 약속해서 서연이가 병원 신고를 취소했다네. 걔 속셈이 뭘까?”
정수아는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언니가 재현 오빠를 포기한 거예요?”
박경희가 콧소리를 내뿜었다.
“일부러 튕기는 거겠지. 나도 여자라서 다 안다니까.”
그날 밤. 당직을 끝낸 정서연은 최예진의 병실을 다시 확인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응급실에서 다급한 전화가 왔다.
“정닥, 약물 자살 시도 환자 도착 예정입니다. 준비해 주세요.”
“네.”
병원 입구에 도착한 그녀는 들것을 밀고 뛰어 들어오는 환자를 보자마자 응급 처치를 하려 했지만, 박경희가 거칠게 그녀를 밀어냈다.
“정서연, 비켜! 네가 수아를 구해줄 리 없어. 다른 의사 불러 와!”
청천벽력 같은 고함에 정서연 심장이 다 떨렸다. 얼굴은 순식간에 굳었다.
“딸 살리고 싶으면 비키세요.”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다른 의사 부르라고 했잖아!”
박경희는 끝까지 막아섰다.
“지금 당직 의사는 저뿐이에요. 기다리든지 장례식장 예약하든지 마음대로 해요.”
“너... 수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 안 둬!”
박경희가 협박했다.
간호사가 박경희를 떼어내자 정서연은 들것을 밀고 뛰면서 진단했다. 미움이 아무리 깊어도, 박경희의 경고가 없었다고 해도, 의사로서 책임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응급실에 도착한 그녀는 곧 지시를 내렸다.
“환자 의식은 유지돼요. 바로 위세척 준비하고 생리식염수...”
그때 정수아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언니, 내가 잘못했어. 나랑 재현 오빠 아무 사이도 아니야. 이혼하지 마. 안 믿겠다면 내가 죽어서라도 증명할게.”
미안함과 죄책감이 섞인 가냘픈 목소리였지만, 정서연의 눈에는 냉소만이 비쳤다. 그녀는 손을 뿌리쳐 내며 간호사에게 수액을 준비하라고 했다.
위세척이 한창일 때, 입원 중이던 최재현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유리창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박경희가 울었다.
“수아가 너희들 사이를 망쳤다며 죄책감에 이렇게 된 거야.”
최재현은 주먹을 서서히 움켜쥐었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약도 많이 먹지 않았고, 위세척하고 관찰만 하면 돼요.”
박경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가 참 팔자도 기구해. 네가 챙겨 주니 그나마 다행이지.”
최재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그녀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아는 서연이 동생이니까요. 다 같은 가족이니 제가 돌볼게요.”
그들이 불쌍히 여기는 정수아는 한창 위세척으로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안색은 아주 안 좋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득의양양한지 모른다.
정수아는 유리창 밖 최재현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며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겼다. 간호사들이 자신을 불륜녀라 수군대는 걸 듣고, 정서연이 당직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녀는 이 자해 연극을 계획했다.
정서연이 이혼으로 겁만 주려 했다면, 그녀는 그 이혼을 현실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