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최도영이 다시 룸으로 돌아오자 안에서는 여전히 같은 화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백연이 주재현에게 들러붙은 일을 말하다 보니 화제가 자연스럽게 하지윤 얘기까지 흘러갔다.
모두가 입에 담고 있는 하지윤은 그들이 인정하는 하씨 가문의 금지옥엽이었다. 하지만 똑같이 자존심이 강한 둘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있었고 결국 한 사람은 미련을 안고 해외로 떠났으나 다른 한 사람은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지난 2년 동안 여러 여자가 주재현에게 접근했지만 모두 보기 좋게 망했다. 그래서 이 바닥 사람들은 그가 오로지 하지윤만 기다린다는 걸 묵인하고 있었다.
“백씨 가문이 예전처럼 잘 나갔다면 백연한테도 기회가 있었겠지.”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이었지만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백씨 가문은 한때 주씨 가문과 하씨 가문에 어깨를 나란히 하던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백연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여기에 있는 이들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백연의 열여덟 때 성년식이 얼마나 화려했었는지를.
그녀는 한때 모두가 떠받드는 빛나는 공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부모가 사망하자마자 단숨에 고아가 되어버렸고 주위는 온통 이빨을 드러낸 하이에나뿐이었다. 백연도 스스로 그 큰 회사를 지킬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과감히 지분을 팔아 떠났다.
그날 이후 해성시에는 백씨 가문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백씨 가문은 이미 없어졌는데 아직도 백연을 백씨 가문 딸이라고 해주는 건... 그건 그냥 불쌍해서 체면 챙겨주는 거지.”
“백연 말이야... 사생활이 화려하다고 들었어. 아주 문란한 여자라던데?”
그 말에 최도영의 손가락이 술잔 위에서 멈칫했고 지나치게 능숙했던 백연의 키스가 떠올랐다...
그 순간 최도영은 기분이 꽤 언짢아졌다.
이때 누군가 아무 말 없는 유준을 보며 놀렸다.
“유준, 난 네가 그 여자랑 사귀는 줄 알았는데 그 여자는 재현이 보러 온 거였어?”
유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 애초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어.”
최도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없이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걸렸다.
‘주재현 보러 왔다고? 씨X, 웃기고 있네.;
그제야 최도영은 뒤늦게 깨달았다. 백연의 진짜 목적은 주재현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가 하지윤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하지윤처럼 꾸미고 그의 시선을 끈 것이었다. 그러고는 강제로 키스까지 해 손을 잡자는 핑계를 댔다고 생각했다.
결국 자꾸 자신과 접점을 만들어 어떻게든 붙어 보려는 심산이었다.
술이 들어가자 최도영은 오히려 머리가 더 맑아졌고 조금 전 하마터면 백연한테 완전히 농락당할 뻔한 자신을 쓸쓸하게 웃으며 비웃었다.
...
백연이 집에 돌아오니 저택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녀는 이 세계에 온 뒤로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모두 내보내고 시간제로 도우미만 들였다.
불을 켜고 소파에 앉은 순간 모르는 번호가 걸려왔다.
백연이 받자 상대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특유의 맑은 음색은 감춰지지 않았다.
“백...연 누나, 저... 어제 말한 그 키워준다는 거, 아직 유효해요?”
상대의 긴장한 기색을 듣자 백연은 손톱을 굴리며 웃었다.
“생각 끝났어?”
잠시 후 느린 대답이 왔다.
“네... 돈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백연은 담담하게 잘랐다.
“미안, 잘생긴 동생아. 나 목표가 바뀌었어. 이제 너한테 흥미 없어.”
전화를 끊자 화면이 꺼졌다.
‘애는 아직 애야. 벌써부터 이렇게 들이대잖아.’
백연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지위가 뒤바뀌지 않는 한 백진우가 선택권을 가질 자격이 없다.
그리고 다른 한편, 백진우는 그녀가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 몰랐다.
가로등 아래 그의 음울하고 고혹적인 눈매가 유리창에 비치며 차갑게 흔들렸다.
백진우가 집에 돌아왔을 때도 바랜 셔츠에 두꺼운 안경을 쓴 모습 그대로였고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누나, 오늘은 일찍 왔네요?”
소파에 앉아있는 백연을 보자 그는 얌전하게 인사를 했다.
백연은 그를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알바 안 갔어?”
원래의 백연은 그에게 단돈 1원도 주지 않았던지라 백진우는 학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밀크티 가게, 밤에는 클럽에서 일했다.
백진우는 고개를 숙인 채 길게 자란 머리로 반을 가리며 손에 든 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말투에는 은근히 비위를 맞추는 기색이 있었다.
“오늘 월급 나와서... 누나 선물 샀어요. 그리고 이것도...”
투박한 포장지의 작은 선물상자 옆엔 밀크티가 있었고 그가 몸을 굽히자 살짝 붉어진 귓불이 스치듯 보였다.
“낮에 밀크티 가게에서 일하니까... 여자애들이 이런 거 좋아하더라고요. 누나도... 좋아할 것 같아서...”
서툴고 어색한 호감 표현이었다.
백연은 그의 유치한 연기를 굳이 지적하지 않고 그저 선물을 빤히 보았다. 그 선물은 싸구려 은색 팔찌였다.
그녀는 자신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을 내밀었다.
“끼워 줘.”
백진우는 그 손목을 바라보며 눈 속의 어둠을 철저히 감췄다.
팔찌는 싸구려 아주 평범한 물건이었다.
거친 손끝이 그녀의 살결을 스칠 때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일그러졌고 그 촉감은 그에게 역한 구역질을 일으켰다.
그는 빠르게 팔찌를 채우고 재빨리 손을 뺐다. 그리고 밀크티에 빨대를 꽂으며 말했다.
“누나... 한 번 드셔보세요. 제가 만든 거예요.”
백연은 그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고 그의 눈앞에서 빨대를 살며시 물었다.
밤이 깊어지고 백연은 드물게 일찍 잠에 취해 밀크티를 반쯤 마신 후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
한밤의 저택은 유난히 조용했다.
희미한 발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더 크게 울렸다. 이때 한 손이 그녀의 방문을 천천히 밀어 열었다.
새어 들어온 아주 약한 빛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흐릿하게 밝혀냈다.
화장기 하나 없어도 눈부신 얼굴이었지만 그 아름다운 껍데기 아래의 마음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백진우의 손끝이 그녀의 목선을 가볍게 따라 움직였다. 밀크티에는 충분한 양의 수면제가 타 있었다.
평소라면 그가 만진 물건을 쓰레기처럼 버렸을 텐데 오늘은 직접 마셨다.
“누나... 난 지금 당장이라도 누나를 죽이고 싶어.”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목 위에서 천천히 위치를 잡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지만 결국...
그의 손가락은 잠옷의 얇은 끈만 슬쩍 들어 올렸고 순간 드러난 새하얀 피부에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