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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병원에 도착한 뒤 의사는 최지은의 상태를 간단히 살피고 나서 최지은을 휠체어에 앉히고 일련의 검사를 받으라고 하면서 검사지를 주었다. “보호자분께서 1층에서 수납을 마치면 바로 2층으로 가서 검사를 받으시면 돼요. 검사가 끝난 뒤에는 다시 올라와서 저한테 진단받으시면 돼요.” 최지은은 휠체어에 앉은 채 검사지를 쥐고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는 그제야 물었다. “환자분 보호자는 어디 있나요?” “죄송해요. 전 운성에 보호자가 없어요.” 최지은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에서는 여전히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살짝 잠긴 목소리에서는 처량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그녀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최지은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아주 까만 눈동자를 보게 되었다. 남자는 최지은을 힐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한 손으로 휠체어를 앞으로 밀면서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남자는 검은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코트 아래에는 아주 값비싼 짙은 회색의 맞춤 정장을 입고 있어 원래도 늘씬한 몸이 더욱 늘씬해 보였다. 최지은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남자는 휴대전화를 코트 안에 넣었다. 그의 주변으로 성숙한 남자의 위엄과 차분함이 느껴졌다. 최지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놀라움과 무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강도윤 씨가 여긴 어쩐 일이세요?” 강도윤은 대답하지 않고 그윽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지막엔 최지은을 바라보며 자신이 입고 있던 검은색 코트를 최지은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운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최지은 씨를 구애할 정도로 잘 나갈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게 그거예요?” “...” 최지은이 코트를 잡아당기며 굳은 표정을 해 보였다. 그것은 최지은이 최씨 가문의 상속을 포기하고 운성에 남아 있겠다고 언니 앞에서 고집을 부렸을 때 했던 말들이었다. 그런데 강도윤이 그걸 알고 있을 줄이야. 최지은은 창피한 듯 고개를 숙였다. 두 뺨이 화끈거렸다. 강도윤은 최지은이 침묵하는 게 별로인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래서 최지은 씨에게 구애하는 사람들은 어디 있죠?” “...” 최지은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도착해 보니 검사실 앞에 사람들이 많았다. 강도윤은 그녀와 함께 복도에서 기다렸다. 그 와중에 전화가 끊이질 않았는데 모두 업무 관련 전화인 듯했다. 서민준이 수납을 마치고 돌아오자 강도윤은 그제야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최지은은 서민준에게서 관련 서류를 건네받으며 감사 인사를 했고 서민준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러면서 최지은을 은근히 살펴봤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최지은은 창피해서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았고 제발 서민준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침묵하며 기묘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때 한수혁이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검사결과지를 바라보며 진서연과 함께 초음파실에서 나왔다. 고개를 든 최지은은 그들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최지은은 휴대전화를 꺼내 한수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수혁이 휴대전화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았다. 고개를 쭉 내민 진서연은 최지은에게서 걸려 온 전화인 걸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요. 지은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잖아요.” 한수혁의 구겨졌던 미간이 그제야 펴졌다. 그는 전화를 받고 말했다. “나 지금 회사인데 무슨 일 있어?” 최지은은 휴대전화를 들고서 유유히 입을 열었다. “혁운이 언제부터 병원을 운영했대?” 최지은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서민준이 타이밍 좋게 몸을 살짝 틀어 한수혁이 최지은을 볼 수 있게끔 했다. 한수혁은 흠칫하면서 켕겨 했다. 진서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한수혁과 거리를 벌리더니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지은 언니, 오해하지 마세요. 대표님은...” 최지은은 진서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한수혁을 응시했다. 한수혁은 최지은이 휠체어에 앉아 있자 이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최지은에게로 걸어갔다. “다쳤어?” 그는 질문을 하면서 환자복을 입고 있고 머리는 젖어 있는 최지은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최지은은 그의 표정을 보면서 그가 거짓말을 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물었다. “여긴 웬일로 왔어?” “사실 얼마 전부터 심장이 아프길래 검사하러 왔어. 네가 걱정할까 봐 굳이 얘기하지는 않았어.” 한수혁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바로 대답했다. 최지은은 한수혁의 거짓말 때문에 마음이 차게 식었다. 곧이어 그녀는 자조하듯 웃으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검사실 안에서 의사가 최지은의 이름을 불렀고 한수혁은 아주 자연스럽게 휠체어를 밀어서 최지은을 데리고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최지은은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강도윤을 보았다. 강도윤은 멀지 않은 곳 복도 중간에 서서 최지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무심했다. 최지은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고개를 숙였다. 사실 최지은은 그녀가 최씨 가문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에게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이 어떠한 목적으로 그녀를 도와주었든 최지은은 난감함과 수치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검사실 문이 닫힌 뒤 강도윤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서민준이 황급히 따라가며 물었다. “그냥 이렇게 돌아가요?” 강도윤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안 그럼?” 서민준은 강도윤의 먼 친척 동생이었는데 강도윤과 최지은이 파혼했던 일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강씨 가문에서는 절대 그 일을 언급한 적이 없어서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방법이 없었다. 궁금한 걸 알아내지 못한 서민준은 조금 아쉬운 듯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댔다. “그러면 병원에는 왜 온 거예요?” 강도윤은 굳게 닫힌 검사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최지은이 나한테 신세를 지게 하려고.” 서민준은 혀를 찼다. “겨우 그것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회의를 뒤로 미루신 거예요?” 최씨 가문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기에 최지은이 그의 신세를 갚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서민준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더 캐물었고 강도윤은 평온한 얼굴로 무심히 그를 바라봤다. “심심한가 봐. 이제 곧 아리엔 쪽 프로젝트가 시작될 텐데 거기로 파견해 줘?” 서민준은 표정이 곧바로 어두워지더니 잘 보이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형, 제발요.” 진서연은 검사결과지를 들고 창백한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서민준과 강도윤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 최지은은 두 사람과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듯했다. 강도윤처럼 대단한 사람을 알고 있는 걸 보면 최지은은 다른 사람들이 얘기한 것처럼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사람은 아닌 듯했다. 한수혁은 의사에게 최지은의 상태를 계속 물었고 최지은이 골절로 당분간은 입원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최지은을 대신하여 모든 걸 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간호 스테이션 간호사들이 모두 최지은을 부러워했다. 모든 일을 처리한 뒤 최지은의 병상 옆에 앉은 한수혁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녀를 배려하는 척 말했다. “지은아, 우리 곧 결혼식인데 너 지금 다쳐서 당분간은 입원해야 하잖아. 우리 결혼식 조금만 뒤로 미루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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