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나는 운전에 집중하는 박지한을 보며 식장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집에 도착한 후 점점 더 선명해졌고 나는 화장대 앞에서 일차적으로 화장을 지운 다음 박지한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쏜살같이 욕실로 달려갔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고 나니 그제야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조금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편히 즐기고 있던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너무 의식한 나머지 그만 삑사리가 나버리고 말았다.
“잠옷 안 가지고 들어갔어.”
이렇게 민망한 순간이 또 있을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바닥에 놔둘게.”
나는 그 말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잠옷이 보이자마자 잽싸게 집어 안으로 들여왔다.
잠시 후.
개운하게 샤워를 마친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으려다가 생각보다 섹시한 디자인에 그만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건 작정하고 상대를 유혹하려는 그런 잠옷이었다.
“하필...”
나는 이마를 짚은 채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에는 이를 꽉 깨물며 잠옷을 몸에 걸쳤다. 나체로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박지한은 교통사고 이후 성기능에 문제가 생겨 잠자리를 할 수 없는 몸이기에 겁낼 것 없었다.
욕실 문이 열리자 소리를 들은 박지한이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뜨거운 눈빛에 괜히 민망한 느낌이 들어 애꿎은 잠옷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박지한은 목울대를 한번 움직이더니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앞으로 뻗어졌을 때 나는 하마터면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 박지한은 그저 잠옷 안으로 말려들어 간 내 머리카락을 다시 밖으로 빼내 줄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앉아. 머리 말려줄게.”
박지한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며 머리를 말려주었다. 나는 따뜻한 드라이기 바람에 몸이 사르르 녹는 것을 느끼며 눈을 살포시 감았다.
박지한은 머리를 말려준 것도 모자라 헤어 오일까지 발라주었다. 그리고 모든 걸 마친 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씻고 올게.”
나는 박지한의 입술이 내 머리 위에 내려앉은 듯한 느낌에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착각인가?
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이내 그럴 일 없다며 방 내부를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클래식한 느낌의 인테리어가 내 마음에 아주 쏙 들었다.
구경을 이어가던 나는 시선을 내리자마자 보이는 큰 침대에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잠시 후 이곳에서 박지한과 함께 자야 할 걸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금 긴장되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깨문채 고민하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여분으로 남겨둔 이불을 하나를 드레스룸에서 가지고 왔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떨어져 잘 수밖에 없고 박지한의 자존심도 지킬 수 있다.
내가 뿌듯해하며 미소 짓던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박지한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허리춤에 타올 하나만 두른 채 젖은 머리를 닦으며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그의 목선과 가슴팍을 지나다 이윽고 복근에까지 떨어지는 걸 보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박지한이 잠자리를 할 수 없는 몸이라 정말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침대 바로 옆에 도착한 박지한은 두 개의 이불을 번갈아 보더니 곧바로 미간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이건 뭐야?”
나는 조금 굳은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빠르게 해명했다.
“오해하지 마. 이러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거니까.”
박지한은 타올을 아무렇게나 던지며 한쪽 무릎을 침대에 올리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얼굴을 기울여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탓에 시원한 바디 워시 향이 콧가를 그대로 스쳤다.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아서 이랬다고? 나한테도 좋은 거 확실해?”
나는 박지한의 눈빛에 괜히 입술이 바짝 말라와 작게 움직이며 서서히 다시 거리를 벌려갔다.
“응...”
그 움직임을 눈치챈 박지한은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더니 다시 나를 원위치 시켰다. 아니, 아까보다 더 거리를 좁게 만들었다.
“왜 이불을 두 개 쓰며 거리를 두는 게 나를 위한 거지?”
나는 우물쭈물하며 좀처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게 남자로서의 너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법이라고 대놓고 말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박지한은 내 허리를 살살 매만지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응? 말해봐.”
지독하게 마주쳐 오는 그의 눈빛에 결국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대답을 해주고야 말았다.
“이렇게 해야 오빠가 마음 편할 거 아니야.”
“왜 그게 내 마음이 편한 건데?”
박지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야... 오빠는 지금 여자를 안지 못하니까...”
나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박지한은 내 말에 이를 꽉 깨물더니 무서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해?”
“사람들이 다... 오빠가 사고 난 뒤로 그렇게 됐다고...”
나는 사람 하나 통째로 씹어먹을 것 같은 그의 눈빛에 얼른 다시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그런 일로 불만을 털어놓을 생각 같은 거 없으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나의 입에서 말이 나오면 나올수록 박지한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나 입 무거워. 절대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해! 그리고 요즘은 워낙 뭐든 잘 돼 있어서 병원에 가면 그 문제도 분명히 해결할 수 있을...!”
박지한은 더는 못 참겠는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