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한때 재벌가 고씨 가문의 딸이었다.
부모는 각자 애인을 두고 나를 사랑해 준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서로 깊이 사랑하던 약혼자, 제국의 최고사령관인 박민재가 있었다.
하지만 반년 전, 전선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박민재가 비밀 작전 도중 매복을 당했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고씨 가문은 눈앞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임신 중이던 나를 또 다른 사령관에게 넘기려 했다.
상대는 예순이 넘은 변태 같은 늙은 남자였다.
그래서 나는 거부하며 배 속의 아이와 함께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돈 한 푼 없이 거리로 나앉았고 이 혹독한 겨울에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이었을 때, 나를 주워간 사람이 한진우였다.
정말 말 그대로, 고물 줍듯이 배가 불러 있는 나라는 골칫덩이를 집으로 데려간 사람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구의 아이를 임신한 건지 아냐고!”
그때 나는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
한진우는 그 순간에도 나를 위해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안경이 뿌옇게 흐려진 탓에 그는 안경을 닦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알아요. 그런데 밖이 춥잖아요. 일단 면부터 드세요. 배불러야 칼 들 힘도 나죠.”
그 말에 내 손에 들려 있던 칼이 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후 아이의 출생신고를 위해, 그리고 고씨 가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나는 한진우와 결혼했다.
평범하고 재미없고 어딘가 조금은 소심해 보이는 그저 성실한 남자와 말이다.
우리의 삶은 마치 맹물처럼 밋밋했고 그 속에는 가난이 남긴 씁쓸함이 은근히 배어 있었다.
한진우는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는지도 모를 자전거를 타고 새벽 시장에 가 장을 봤다.
그리고 아침밥을 차려 놓고 나를 깨웠다.
출근 전에는 치약을 미리 짜 두고 미지근한 물을 받아 놓고 심지어 변기 커버에 천을 씌워 내가 차가울까 봐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었다.
도서관 일은 한가한 편이었지만 그는 매일 폐기된 신문과 잡지를 몇 부씩 들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고물로 팔려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신문에 있는 육아 코너를 오려내기 위함임을 알아챘다.
그는 오려낸 기사들을 노트에 가지런히 붙여 놓고 그 위에 빼곡하게 메모를 남겼다.
[임산부 다리 쥐 났을 때 마사지법.]
[임신 후기 식단 추천(절약형).]
[신생아 돌보기 100가지 주의사항.]
그 노트는 한진우의 월급 통장보다 훨씬 두꺼웠다.
가끔 한밤중에 다리에 쥐가 나 아파서 신음 소리를 내면 한진우는 늘 가장 먼저 깨어났다.
불을 켜지 않아도 정확히 내 종아리를 잡아 딱 알맞은 힘으로 마사지를 해주었다.
거칠고 손끝에는 굳은살이 있었지만 손바닥은 뜨거워서 따뜻함이 끊임없이 전해졌다.
“좀 나아졌어?”
그가 어둠 속에서 낮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응.”
“아직 아파?”
“아니.”
“그럼 다행이네. 자, 내가 조금만 더 주물러줄게.”
그는 그렇게 내가 다시 잠들 때까지 계속 주물러 주었다.
가끔 잠결에 눈을 뜨면 창밖의 달빛 아래 침대 머리에 기대 졸고 있는 한진우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는 꾸벅꾸벅 떨어지는데 손만은 기계처럼 내 다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마음속 깊이 얼어붙어 있던 단단한 얼음에 조용히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평생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대단한 능력도 없었지만 한진우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게 온기를 내어준 성실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