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지옥에나 가버려
어느 순간, 안재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자기야, 나 자기 사랑해. 그래서 다른 남자가 널 건드리는 꼴은 못 봐. 그러니까 날 화나게 하지 마. 응?”
안재우는 꿀 발린 말을 잘했고 강지연에게도 다정했다. 바보 같은 강지연은 한때 안재우를 만난 것을 큰 행운이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안재우가 했던 달콤한 말들은 독이 발린 화살이 되어 강지연의 몸에 박혔다.
안재우의 배신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가 능욕당하고 아빠가 살인을 저질러 사형당한 것은 그녀를 평생 후회와 증오의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했다.
안재우는 강지연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보자 마음이 아파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안재우는 강지연이 자신의 말에 흔들렸다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그녀를 달랬다.
“앞으로는 절대 너 속상한 일 없게 할게. 나 진짜 마음이 너무 아파. 그러니까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 응?”
강지연은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재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지연이 꼭 기숙사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안재우는 자신의 새 전화번호를 그녀의 휴대전화에 저장해두고는 미련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차에서 내린 강지연은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면서 길을 걸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서효진 씨, 안녕하세요. 서효진 씨한테는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 오늘 밤에 우연히 서효진 씨 약혼자를 만났는데... 저한테 이번에 서효진 씨와의 약혼을 깨러 온 거라고 하더라고요. 미리 준비를 해두셔야겠어요.”
전화를 끊은 뒤 강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 페라리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헤드라이트를 밝혔다. 그 순간 강지연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부시게 환한 빛에 완전히 집어삼켜졌다.
이내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도착하면 연락해.]
강지연은 깜짝 놀라 빠르게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걸음에 박차를 가하면서 그 번호를 차단했다.
학교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강지연은 자신의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엄마, 그 사람들 요즘 또 찾아와서 난리 쳤어요?”
양효선이 대답했다.
“아니. 그냥 마트 앞에서 매일 번갈아 가면서 감시해. 내가 도망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야.”
강지연이 말했다.
“지금 수중에 6천만 원 있는데 내일 일단 보내드릴게요. 그거 조금씩 나눠주고 그 사람들한테 다음 달 이때쯤에 또 주겠다고 하세요.”
“지연아, 솔직히 얘기해 봐. 그 돈들 다 어디서 난 거야?”
강지연은 열쇠로 자취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얘기 드렸잖아요. 이번 달에 별장 팔았다고요. 지금 집이 좀 잘 팔릴 때라서 빨리 팔려요. 조금 더 노력하면 다음 달에 또 하나 팔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엄마, 돈은 걱정하지 마세요. 빚은 곧 다 갚을 수 있을 거예요.”
“지연아...”
“엄마, 이만 끊을게요. 저 오늘 야근해야 해서요. 부동산 자료 조금 더 봐야 해요.”
강지연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민해윤이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부동산 경기가 얼마나 안 좋은데 집을 팔았다고 해? 차라리 차를 팔았다고 하지. 오늘 저녁은 어땠어? 성과는 있었어?”
강지연은 오늘 밤 있었던 일을 민해윤에게 간단히 설명한 뒤 물었다.
“또 한 번 찾아가면 기회가 있을까요?”
민해윤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 안재우 그 사람이 갑자기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오늘 넌 성공했을 거야.”
강지연이 말했다.
“저 한 번 더 시도해 보고 싶어요.”
민해윤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너 정도면 스폰으로 4억 받는 거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려는 거야? 진우현 그 사람 그 짓으로 여자 한 명 죽였다는 소문도 있어. 그런데 굳이 그 사람이어야 해?”
강지연이 민해윤을 통해 이 업계에 발을 들인 지는 한 달 조금 넘었다. 강지연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아서 4억 정도 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지연이 원하는 건 돈뿐만이 아니었다.
강지연의 엄마는 능욕당했고 아빠는 죽었다. 서효진이 그녀에게 빚진 건 고작 뺨 두 대가 아니었다.
강지연은 서효진을 시궁창에 처박아 넣어야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강지연의 머릿속에 룸 안에서 보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진우현이 얼마나 무자비한 인간인지를 알고 있었다. 계속해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호랑이를 잡겠다고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진우현을 제외하면 북성에 그녀가 기대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민해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넌 오늘 진우현을 속였어. 그런데 진우현은 널 멀쩡히 돌려보냈지. 내 생각엔 안재우 체면을 고려해서 그런 것 같은데 어쩌면 다음번에는 진우현을 만날 기회조차 없을지 몰라. 그런데 어떻게 시도할 생각이야?”
강지연은 바지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서 뺀 뒤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손바닥에 에르메스 커프스단추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진우현이 그녀에게 꺼지라고 하기 전에 강지연이 실수인 척 떼어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