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송찬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서 송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변호사님, 유언장 확인해 봤는데 문제없네요.”
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그럼 여기에 서명해 주시면 됩니다.”
송찬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병실 안에는 송은정 외에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와 자기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유언장이요? 무슨 유언장이요?”
송찬미는 송은정을 향해 물었다. 커다래진 눈동자에 고통의 빛이 스쳤다.
“엄마, 변호사까지 불러서 유언장을 만들었어요?”
‘엄마가 왜 하필 내가 없을 때 몰래 유언장을 작성한 걸까? 혹시 이제 병이 나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생각에 송찬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송은정이 시선을 피했다.
“찬미야,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야.”
송찬미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그녀는 목이 메어 말했다.
“엄마, 괜찮을 거예요! 분명히 다 나을 수 있어요.”
“송 여사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잠깐만요.”
송찬미가 그를 돌아보았다.
“장 변호사님, 유언장 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장 변호사는 송은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송은정이 재빨리 말했다.
“찬미야,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내가... 없을 때, 그때 봐.”
“왜 지금은 안 되는데요?”
송찬미가 되물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야.”
송은정이 장 변호사에게 눈짓했다.
장 변호사는 조용히 비서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찬미야, 밥은 먹었니?”
송은정이 화제를 돌렸다.
“네. 먹었어요.”
엄마가 유언장 얘기를 피하는 걸 본 송찬미도 더는 묻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요즘 잠을 잘못 자는구나. 눈 밑이 퀭하네.”
송은정이 앙상한 손을 뻗어 딸의 눈가를 안쓰럽게 쓰다듬었다.
송찬미는 눈을 감고 엄마의 손길을 느꼈다.
“괜찮아요. 그냥 다크서클이에요.”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어서 송찬미는 일부러 장난을 쳤다.
“엄마, 나 지금 팬더 같지 않아요? 완전 국보급이죠. 하하.”
그 모습에 송은정의 눈에 어린 아픔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없으면 이 아이는 혼자 어떻게 살아갈까.’
“엄마, 나 기말고사 끝나면 우리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가요.”
송찬미가 말했다.
“친구가 부산 화광 병원에 아는 분이 있어서 특진 예약 잡아줄 수 있대요. 강릉보다 부산 의료 기술이 훨씬 좋으니 우리 거기로 가요.”
송은정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부산은 치료비가...”
송찬미는 엄마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돈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내가 어떻게든 알아볼 테니까.”
모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송찬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밖의 사람을 확인한 송찬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송찬미 씨?”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전 허선영이라고 해요. 영준한테 제 얘기 들었을 텐데요?”
송찬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말을 마친 그녀는 송은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 친구가 잠깐 볼일이 있다고 해서요.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그럴 것 없어요. 그냥 여기서 얘기하죠.”
허선영이 송찬미를 밀치고 병실로 들어왔다.
“당신이 송찬미 엄마예요?”
허선영은 침대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쳐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송은정을 쳐다봤다.
“그래. 찬미 친구니?”
송은정은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허선영은 비웃음을 날리며 악의에 찬 얼굴로 쏘아붙였다.
“친구? 하, 저딴 애랑 친구가 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데요? 따님이 제 남자를 가로챈 불륜녀인 건 알고 계시나 몰라? 대체 딸자식을 어떻게 키우셨길래 이 모양이죠? 정말 뻔뻔하시네!”
송은정은 이 여자가 처음부터 나쁜 의도로 찾아와 이런 말을 내뱉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찬미가 남자친구를 뺏었다니?
송은정은 분노에 입술을 떨며 순식간에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 찬미는 그런 애 아니야! 함부로 말하지 마! 당장 꺼져!”
송찬미는 엄마가 흥분해서 병세가 악화될까 봐 급히 허선영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나가! 당장 꺼져!”
허선영은 비웃으며 조롱했다.
“송찬미, 너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영준이한테서 떨어져. 너처럼 돈 많은 남자 하나 물어서 인생 역전하려는 속물들, 지긋지긋하게 봐왔거든. 꿈도 꾸지 마. 네 주제에 어딜!”
“꺼지라고!”
송찬미는 혐오와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허선영을 힘껏 밀쳐냈다.
“내가 이곳을 어떻게 알아냈을 것 같아? 다 이 병원에 연줄이 있으니 가능한 거지. 듣자 하니, 네 엄마 암이라던데?”
허선영은 잔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것 봐, 천벌 받은 거잖아. 네가 상간녀 짓 한 업보를 네 엄마가 대신 받는 거라고. 그러다 네 엄마...”
짝!
더는 모욕을 견딜 수 없었던 송찬미가 손을 번쩍 들어 허선영의 뺨을 내려쳤다.
“닥치고 꺼져!”
그녀는 온 힘을 다한 듯 살기 어린 눈으로 악을 썼다.
병실 밖으로 밀려난 허선영은 길길이 날뛰었다.
“네가 감히 날 쳐? 네가 뭔데 날 때려?”
소란을 듣고 간호사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여긴 병원이니 소란 피우지 마세요.”
허선영은 문밖에서 송찬미와 바로 몸싸움을 벌였고 여러 간호사가 달려와 둘을 떼어놓았다.
송찬미는 살벌한 표정으로 간호사에게 말했다.
“이 여자가 일부러 와서 시비 거는 거예요. 당장 쫓아내 주세요.”
싸움이 격해지자 두 명의 간호사가 허선영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허선영은 욕을 하며 간호사들에게 끌려나갔다.
그러자 다른 간호사 한 명이 불만스럽게 송찬미에게 물었다.
“여기서 소란 피우시면 어떡해요? 병원인 거 모르세요?”
“이 병원은 환자 개인 정보를 마음대로 흘리고 다녀도 되나요?”
송찬미가 따져 물었다.
“저 여자가 직접 말했어요, 이 병원에 빽이 있다고요. 저는 저 여자랑 일면식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 엄마 병실 호수랑 병명까지 정확히 알고 찾아올 수 있는 거죠? 이게 이 병원의 규정입니까?”
간호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그 화풀이를 저한테 하시는 건데요? 제가 흘린 것도 아니고. 억울하면 원장실 가서 따지시든가요.”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무어라 투덜거리며 휙 돌아서 가버렸다.
송찬미는 심호흡으로 감정을 추스른 뒤에야 병실로 돌아갔다.
“찬미야, 누구니? 아까 그 여자가 한 말은 다 무슨 뜻이야?”
송은정은 눈물을 글썽이며 핏기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송찬미는 엄마의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녀는 얼른 침대 옆에 앉아 엄마를 끌어안고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그냥 헛소리하는 미친 여자예요. 저는 그런 파렴치한 짓 절대 안 해요. 그 여자 말 듣지 마세요.”
병마에 시달린 엄마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송찬미는 엄마를 안자 앙상한 뼈가 몸에 부딪혀 마음이 시큰거리고 아팠다. 마치 심장을 누가 쥐고 비트는 것 같았다.
송은정의 창백하고 여윈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찬미야, 엄마는 우리 딸이 그런 애 아니란 거 믿어. 내가 키운 내 딸 성정을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엄마는 그냥 네가 안쓰러워서 그래.”
송은정은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찬미, 밖에서 힘든 일 있었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송찬미의 마음속에 쌓아 올렸던 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그녀는 엄마의 품에 얼굴을 깊이 묻고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고생 많았다, 내 새끼...”
송은정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송찬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송찬미는 겉은 여려도 속은 강단 있는 아이였다. 심영준에게 배신당했을 때도 식당 사장에게 수모를 겪었을 때도 엄마에게는 티 한번 내지 않고 혼자서 모든 걸 삭여왔다.
하지만 이 순간의 그녀는 어릴 적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와 같았다. 아무도 달래주지 않을 땐 울음을 참을 수 있었지만, 엄마가 알고 위로해주기 시작하면 마음속 서러움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어 오히려 더 크게 우는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