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화

밤 10시, 과외를 막 끝낸 송찬미는 삐에로 인형 탈을 쓴 채 직원을 따라 룸으로 들어섰다. 룸메이트인 임서월이 일하는 라운지였는데 오늘 갑자기 남자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송찬미에게 대타를 부탁한 것이었다. 재벌가 자제들의 파티에서 분위기만 띄워주면 10분당 20만 원의 기본 보상과 별도로 팁까지 준다고 했다. 이건 완전 꿀알바였다. 룸에 들어선 송찬미는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영준 형, 그 거지 놀이는 이제 그만할 때 안 됐어? 형 좋다는 여자가 줄을 섰는데, 왜 그런 애를 만나?” 심영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넌 몰라. 나 좋다는 애들은 다 내 돈 보고 오는 거지만, 우리 찬미는 찐 사랑이거든. 찬미는 나 맛있는 거 사주고 좋은 옷 입히려고 쓰리잡까지 뛰는 애야. 걔들이 그럴 수 있겠어?” 말을 뱉은 사람은 바로 2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 심영준이었다. 불과 10분 전, 다정하게 잘 자라며 전화를 끊었던 그였다. ‘거지 놀이?’ 송찬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심영준은 그녀에게 집에서 한 달에 생활비를 십만 원밖에 안 줘서 맨밥에 공짜 국물로 끼니를 때운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송찬미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식을 사주고 더 나은 옷을 입히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했다. 수업이 거의 없던 그녀는 낮에는 카페에서 음료를 만들고 밤에는 식당에서 서빙을 했으며 주말에는 아이들 과외를 했다. 그야말로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자신은 몇만 원짜리 원피스 하나 사는 것도 아까워하면서 그에게는 몇십만 원짜리 운동화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주었고 정작 자신은 학생 식당에서 가장 싼 나물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심영준과 데이트할 때는 항상 그를 데리고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계산했다. 너무 지쳐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녀는 심영준을 떠올렸다.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던 심영준을 말이다. “찬미야, 정말 사랑해. 너와 가정을 꾸리고 싶어.”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나중에 꼭 성공해서 호강시켜 줄게.” 지난 2년간 심영준은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그의 연극이었다니. 그때, 어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영준 형, 송찬미랑 이번 방학에 인사드리고 내년에 졸업하자마자 결혼한다며? 설마 걔한테 진심 된 거 아니지?” 소파에 깊숙이 기댄 심영준은 우아한 손길로 와인잔을 돌리며 다른 손에 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설마. 걘 어릴 때부터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 애정 결핍이 심해. 빨리 결혼해서 온전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안달 난 애라고. 난 그냥 장단 맞춰주면서 기분 좋게 해주는 것뿐이지, 진짜로 결혼할 리가 있겠어?” “아, 그런 거였어?”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그렇게 연애에 목을 매더라니. 네가 그렇게 가난한 척하는데도 2년이나 만나주고 돈은 안 쓰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제 돈까지 써가면서 말이야. 애정 결핍이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심영준의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하긴, 네가 어떤 사람이냐. 심씨 가문의 후계자인데 송찬미 같은 애랑은 클라스가 다르지.” “맞아. 심씨 가문의 도련님이 그런 흙수저한테 빠졌다고 하면 집안 망신이지.” “아버지 없이 자란 여자애들이 원래 좀 순진하잖아. 달콤한 말로 살살 구슬리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지. 하하.” “형 옆자리는 당연히 선영 누나 아니겠어?” “선영 누나 곧 오실 텐데, 대학교에서 이런 애 만나는 거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심영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선영이도 나 버리고 3년이나 유학 가 있었잖아? 알면 어쩔 건데. 이참에 송찬미로 속 좀 긁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송찬미가 형이 선영 누나한테 6천만짜리 가방을 사줬다는 걸 알면 기절하겠어.” “그니까. 2년간 거지인 척 빌붙어서 등골 빼먹었잖아. 그것도 모르고 걔는 형 때문에 쓰리잡 뛰고 있는데 형이 다른 여자한테는 돈을 물 쓰듯 한다는 거 알면 진짜 빡돌겠지?” 심영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찬미는 모를 거야.” 그는 몰랐다. 송찬미가 바로 제 코앞에 서 있다는 걸. 인형 탈은 지독하게 무겁고 숨 막혔다. 송찬미는 이대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심장이 칼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듯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다른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계속 속일 생각이야?” 심영준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직 실컷 놀지도 못했거든. 누구든 헛소리 지껄여서 송찬미한테 흘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나한테 죽는다.” “하긴, 송찬미 걔가 찢어지게 가난한 것만 빼면 얼굴 예쁘고 피부 하얗고 몸매도 좋잖아. 솔직히 좀 꼴리더라. 형 눈썰미 좋네.” “그야 당연하지.” 심영준이 비웃으며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다. “가지고 노는 거라도 못생긴 애는 참을 수 없어.” “2년 사귀었으면 이미 따먹은 거 아냐?” “아직.” 심영준이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엔조인데 걔랑 자서 뭐하게. 저런 가난뱅이 년들이 한번 대주면 목숨 걸고 달려든다고. 뒤처리 귀찮아지잖아.” 무리가 배를 잡고 웃었다. 송찬미는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안 가득 피비린내만 맴돌 뿐이었다. 조금 전, 저도 모르게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탓에 배어 나온 피 맛이었다. 누군가 건들거리며 말했다. “그럼 형이 질리면 나한테 넘겨. 형이 안 따먹으면 내가 따먹게. 저런 에이스를 그냥 썩히는 건 예의가 아니지.” 심영준의 얼굴이 굳어지며 칼날 같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눈동자에는 섬뜩한 냉기가 어렸다. 그가 화난 것을 눈치챈 남자가 머쓱해 하며 말했다. “아, 형. 화내지 마. 그냥 해본 소리야.” 심영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잘 들어. 송찬미한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네놈 팔다리 분질러 버릴 줄 알아.” “아, 아니! 형,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내가 미쳤다고 감히 어떻게 그래.” 그때였다. 룸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가 봐도 재벌 딸처럼 보이는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온몸을 샤넬로 휘감은 여자는 탐스러운 갈색 웨이브 머리를 하고 있었다. “무슨 재미있는 얘기하고 있었어?” 여자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심영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심영준은 표정을 바꾸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제야 돌아오냐. 난 네가 나 까맣게 잊은 줄 알았어.” 허선영이 요염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네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잊지 못하는 사람이잖아.” “진심이야?” “당연히 진짜지.” 허선영은 그의 얼굴로 바짝 다가가 먼저 자신의 입술을 심영준의 입술에 포갰다. 심영준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송찬미는 눈앞의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고 심장 박동마저 멎어버린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심영준의 친구들이 부추겼다. “선영 누나, 형이랑 언제 다시 사귈 거야? 형이 3년 동안 목 빠지게 기다렸는데.” 허선영이 심영준의 입술에서 떨어져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는 거 봐서.” 말을 마친 여자가 삐에로 인형을 보며 물었다. “이건?” “너 즐거우라고 불렀지.” 심영준은 마침내 오랫동안 말없이 서 있던 눈앞의 광대를 쳐다보았다. 송찬미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멀뚱히 서서 뭐 하냐? 춤이라도 춰 봐.” 심영준이 귀찮다는 듯 쏘아붙였다. 송찬미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오기 전 룸메이트 임서월이 제발 이 알바만은 망치지 말아 달라고 빌었었다. 여기서 사고 치면 자기는 돈도 못 받고 임서월까지 여기서 쫓겨날 판이었다. 송찬미는 룸메이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찢어지는 마음과 설움을 억지로 참아내며 남자친구 앞에서 다른 여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광대 짓을 했다. 춤을 추던 중, 송찬미는 심영준이 그 여자를 끌어안고 다시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마치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처럼 헤어지기 아쉬운 듯 키스했다. 송찬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방울이 터져 나왔다. 이 순간, 송찬미는 삐에로 인형 탈을 쓴 자신이 진짜 광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12월의 강릉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감돌았다. 설상가상으로 차가운 비까지 흩뿌리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차가운 바람이 옷깃과 소매 사이로 파고들어 뼛속까지 시렸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송찬미는 빗속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외로운 영혼처럼 그저 걷고 또 걸었다.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리고 나서야 그녀는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웃집 아주머니 김정숙의 전화였다. 송찬미는 멍하니 전화를 받았다. “찬미야, 빨리 좀 와봐! 네 엄마 큰일 났어!”
Previous Chapter
1/100Next Chapter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