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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송찬미의 집은 강릉 근처의 한 작은 도시에 있었다. 평소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가곤 했지만 이 시간엔 이미 버스가 끊긴 후였다. 급하게 카풀 앱을 켰지만 5분이 넘게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구를 때,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그녀 앞에 스르르 멈춰 섰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가자 조각상 같은 얼굴이 나타났다. 송찬미는 순간 멍해져서 중얼거렸다. “신승우?” 남자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깊은 눈매를 가졌고 금테 안경 아래로 길게 찢어진 눈은 서늘하고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차갑고 다가가기 힘든,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신승우의 시선이 그녀에게 잠시 머물렀다. “타.” 거부할 수 없는 말투였다. 송찬미는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지만 여전히 응답하는 기사는 없었다. 송찬미는 짧게 고민하다 입술을 깨물고는 호출을 취소한 뒤 차에 올라탔다. 바로 옆자리에서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이 밤중에 혼자 왜 이러고 있어. 비 오는데 우산도 안 쓰고.” 신승우가 말을 꺼내자마자 눈치 빠른 기사가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새 수건을 꺼내 뒷좌석 창문으로 건넸다. 남자는 수건을 받아 자연스럽게 송찬미에게 건넸다. 희고 긴 손가락의 뼈마디가 유난히 돋보였다. “닦아, 감기 걸리지 말고.” “고마워요.” 그녀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겨우 감사 인사를 하고는 수건 포장을 뜯어 젖은 머리를 닦았다. 차 안은 히터가 빵빵해서 송찬미는 차가웠던 몸에 조금씩 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좁은 공간 안, 신승우에게서 풍기는 서늘한 우디 향이 코끝을 스치며 아릿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송찬미와 신승우가 처음 만난 건 5년 전, 그녀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짝꿍이었던 신지영과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주말 신지영이 자기 집에 놀러 오라며 그녀를 초대했다. 송찬미가 태어나 처음으로 발을 들인 별장이었다. 눈앞의 대저택을 보며 송찬미의 맑은 눈동자는 충격으로 가득 찼다. 그때 처음으로 빈부격차라는 것을 실감했다. 신지영을 따라 집 구경을 하다 수영장을 지날 때, 그녀는 막 물에서 나오는 신승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예상치 못하게 신승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송찬미는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그녀는 그렇게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신이 작정하고 빚은 얼굴이었다. 주황빛 노을이 그의 몸 위로 쏟아졌고 머리칼 끝에 맺힌 물방울은 몽환적으로 빛났으며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순간, 송찬미는 제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쿵, 쿵, 쿵. 그 여름날의 저녁, 심장 소리는 끝없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신승우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그녀는 줄곧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여름방학에 다시 신지영의 집에 놀러 갔다가 송찬미는 신승우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자는 신승우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에 예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 신승우와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지영의 생일 파티에서 송찬미는 신승우의 여자친구를 직접 보게 되었다. 정말 신지영의 말대로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멀리서 나란히 서 있는 그들을 보자 송찬미는 마음속 깊은 곳의 자격지심을 숨길 곳이 없었다. 그녀의 짝사랑은 그렇게 그날 소리소문없이 끝나버렸다. “어디 가.”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잡아끌었다. 송찬미는 다소 위축된 목소리로 말했다. “승우 오빠, 저 좀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엄마한테 큰일이 생겼다는데 차가 안 잡혀서요. 차비는 꼭 드릴게요.” “주소.” 그녀는 아파트 주소를 불렀다. 차 안의 히터 덕분에 송찬미의 옷과 머리카락은 금세 말랐다. 집으로 가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신승우가 입을 열었다.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송찬미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잠시 놀랐다. 아마도 그저 의례적인 인사말일 것이다. 송찬미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녀는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요, 승우 오빠. 차비는 보내드릴게요.” 과거에 연락처를 교환한 적은 있었으나 근 몇 년간은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황급히 하차하여 단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신승우는 겨우 시선을 돌렸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야, 너 왜 이렇게 안 와? 어디 귀신한테 홀리기라도 한 거야?”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승우의 목소리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가는 길에 일이 좀 생겨서 늦었어. 오늘 못 갈 것 같으니 너희끼리 놀아.” “뭐? 너 또 바람맞히는 거냐? 무슨 일인데?” “중요한 일.” ... 송찬미는 냅다 뛰어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집에 들어서자 엄마 송은정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창백하고 몹시 수척해 보였고 옆집 김정숙 아주머니가 옆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송찬미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아까 김정숙은 전화해서 그냥 큰일 났다고만 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김정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니, 그래도 찬미한테는 직접 말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찬미야...” 송은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송찬미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짓눌러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송은정은 딸을 한번 쳐다보았다. 수척한 얼굴에 고통이 가득했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위암이래.” 윙 하는 이명과 함께 송찬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김정숙이 다급하게 말했다. “찬미야, 네가 엄마 좀 말려봐. 이제 겨우 마흔 넘었는데 어떻게 벌써 치료를 포기해. 내가 오늘 저녁에 반찬 주러 왔다가 우연히 그놈의 검사 용지 못 봤으면, 너한테 평생 숨겼을 사람이야!” “말릴 거 없어.” 송은정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위염도 아니고 위암이야. 이건 못 고치는 병이라고. 괜히 병 고치겠다고 집안 기둥뿌리 뽑느니, 그 돈 남겨서 우리 찬미 공부시키는 게 나아.” 송찬미는 엄마에게 다가가려다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깟 공부가 엄마 목숨보다 중할 리가 없잖아요.” 송은정은 눈물을 글썽이며 목이 메어 말했다. “찬미야, 엄마 병은 못 고쳐. 나라고 죽고 싶겠니.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너 혼자 세상에 남을까 봐 그게 겁나.” “그럼 살아야지!” 송찬미는 엄마 옆에 주저앉아 어깨를 꽉 끌어안고 엄마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댔다.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엄마, 내 말 들어요. 우리 제대로 치료받아요. 포기하지 말고. 난 정말 엄마 없으면 안 돼요. 엄마...” 김정숙도 거들었다. “맞아, 언니. 의사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잖아. 아직 중기라 괜찮대. 그러니 포기하면 안 돼.” 송은정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 살림에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해. 내가 몇 년 동안 겨우 모은 돈이 4천만 남짓인데 의사한테 물어보니까 치료하려면 수억은 든대. 우리 집에 그만한 돈이 어딨어? 설령 돈이 있다고 해도 나을 거란 보장도 없는데 그냥 관두는 게 낫지.” “안 돼요.” 송찬미의 태도는 단호했다. “돈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 거니까 엄마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이 좀 있으니 일단 그 돈으로 입원해서 치료 시작해요. 내일 아침 바로 강릉대병원에 가서 입원 수속 밟아요.” “찬미야...” 송은정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 송찬미는 비통한 심정으로 애원했다. “엄마, 제발. 내가 이렇게 빌게요. 나 정말 엄마 없으면 못 살아요. 그냥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주세요.” 송은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송찬미는 오랜만에 엄마의 품에서 잠들었다. 엄마와 딸이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송찬미는 어릴 때처럼 엄마 품에 파고들었다. “엄마, 나한텐 엄마밖에 없어요. 제발 나 버리지 말아요.” 송은정은 사랑스럽게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찬미야, 부디 너 자신을 잘 챙겨야 한다.” 송찬미는 엄마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엄마, 나도 잘 챙기고 엄마도 잘 챙길 테니까 엄마는 분명 괜찮아지실 거예요.” 밤새도록 송찬미는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자고 일어났을 때 엄마가 곁에 없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칠흑 같은 밤, 송찬미는 어둠 속에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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