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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세린아, 어제 모임에 몸이 안 좋다고 안 왔던데. 오늘은 좀 어때?” 운조 힐스에 도착하자마자 하태원은 방세린에게 생강차를 건넸다. “정희 아주머니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거야. 어서 마셔.” 방세린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매달 생리 날짜를 꿰뚫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너랑 같이 집에 있을까?”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 너머의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하태원은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TV에 방세린이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방세린이 어깨를 움츠리자 하태원은 재빨리 담요를 덮어주고는 커다란 손으로 아랫배를 문지르며 웃으면서 물었다. “핫팩보다 더 좋지?” 얼핏 보면 정말로 다정하고 따뜻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하태원이 휴대폰을 힐끗 보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방세린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린아, 아무래도 오늘은 옆에 있어 주지 못할 것 같아.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겼어.” 방세린은 TV만 볼 뿐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알았어. 가 봐.” 하태원이 뿌듯해하며 말했다. “역시 내 여자친구는 사려가 깊다니까.”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돌아서서 방세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음에는 제대로 옆에 있어 줄게.” 그가 나간 후 방세린은 흥미를 잃고 TV를 꺼버렸다. ‘다음에? 하지만 태원 씨, 우리한테 다음은 없어.’ 방세린은 휴대폰을 꺼내 위준우라고 저장된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 오후 3시에 갈게요.] 그러고는 다시 메시지 창을 열었다. 30분 전 송주아가 보낸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태원 오빠 마음속에서 누가 더 중요한지 확인해볼래?] 딩동 하는 알림 소리와 함께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무래도 내가 좀 더 중요한 것 같은데?] 방세린은 바로 휴대폰을 내던졌다. 얼굴이 핏기없이 창백해졌고 거대한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하태원이 나간 후 방세린도 곧바로 운조 힐스를 나섰다. 선배와 약속을 잡고 고등학교 2학년인 그의 남동생에게 과외를 해주기로 했다. 과거 방세린의 세상은 항상 하태원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이상 그가 남긴 빈자리를 채울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만 그가 없는 삶에 적응할 수 있을 테니까. 두 시간 동안의 과외가 끝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마침 거실에서 선배를 만났다. 선배 위준우는 지도 교수가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자랑스러운 제자로 올해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위준우는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방세린은 손을 저으며 거절했다. 그러자 위준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강아지 산책시키는 김에 데려다줄게. 괜찮아.” 털이 복슬복슬한 사모예드가 위준우의 다리에 기댄 채 혀를 내밀며 웃고 있었고 도우미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세린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 산책은 보통 밥 먹은 후에 하지 않나? 밥 먹기 전에 하는 건 좀 특이하네.’ 하지만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고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별장 단지의 녹지화가 잘 되어 있어 경치가 아름다웠다. 산책을 하니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반쯤 걸어갔을 때 위준우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몸을 숙여 방세린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나는 깨끗한 비누 향기를 맡은 방세린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피했다. 위준우가 손을 거두자 손에 나뭇잎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방세린이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세린아, 조심해서 걸어야지.” 방세린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웃었다. “고마워요.”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린아.” 방세린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져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역시나 하태원의 얼굴이 보였다.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녀를 지켜보던 하태원은 저도 모르게 짜증이 솟구쳤다. 그도 위준우를 알고 있었다. 위경 그룹 회장의 장남인데 좋은 후계자 자리를 놔두고 의사가 되겠다고 의학을 배웠다. 평소에도 방세린을 잘 챙겼다. 같은 남자로서 하태원은 그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는 소유권을 주장하듯 걸어와 방세린의 어깨를 감쌌다. “세린아, 집에서 푹 쉬라고 했잖아. 왜 나왔어?” 방세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위준우는 방세린의 어깨에 올려진 하태원의 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은 세린이의...” 하태원이 송산 그룹의 딸과 약혼했다는 소식을 운성시 명문가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위준우도 알고 있었다. 하태원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가 이미 약혼했다는 말을 꺼낼까 봐 급히 말했다. “세린이 몸이 안 좋아서 데리러 왔어요.” 그러고는 위준우가 반응하기도 전에 방세린과 함께 마이바흐로 향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위준우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고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차에 탄 후 하태원은 방세린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따지듯 물었다. “왜 위준우랑 같이 있어?” 방세린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그럼 태원 씨는 왜 여기 있는 건데?” 사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방세린은 알고 있었다. 송씨 저택과 위준우네 집이 한 별장 단지라 아마 송씨 저택에서 나오는 길에 우연히 두 사람을 봤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태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이내 사라졌다. “지나가는 길이었어.” 하태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방세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왜 저 사람이 널 만지는 데도 가만히 있어? 넌 내 사람이라는 걸 잊었어?” 순간 무력감을 느낀 방세린은 눈을 감아버렸다. “내려줘.” 그녀의 냉랭한 반응에 하태원은 잠시 멍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2초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때 머릿속에 그녀와 위준우가 가까이 붙어있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왜? 다시 돌아가서 위준우를 만나려고?” 그러고는 갑자기 방세린의 턱을 꽉 잡고 강제로 입을 맞췄다. 방세린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이게 바로 하태원이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며 남에게는 충성을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방세린은 반항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에게 입을 맞추던 하태원은 문득 짠맛이 느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방세린을 놓아주었는데 얼굴에 눈물 자국 두 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순간 당황한 하태원은 그녀의 눈물을 허둥지둥 닦아주었다. “세린아, 울지 마. 미안해. 질투심에 눈이 멀어서 그랬어. 내가 잘못했어, 응?” 방세린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이 눈물이 아마 하태원 때문에 흘리는 마지막 눈물일 것이다. 하지만 하태원은 그녀가 용서했다고 오해하고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 “세린아, 화 풀었다니 다행이야. 유니월드에 가고 싶다고 했지? 내일 가자. 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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