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녀는 처음으로 나도윤을 만났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작은 시골 마을을 떠나 도시로 올라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첫날이었다. 버스 안에서 그녀는 주머니를 더듬다 지갑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그 모습을 본 운전기사는 불쾌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돈 없으면 내려요.”
그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속삭이는 소리와 수군거림이 번졌고 차가운 눈빛들이 거리낌 없이 꽂혔다. 이소은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 서서 발만 동동 굴렀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동전을 쑥 내밀었다.
“제가 낼게요.”
이소은이 돌아보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큰 키에 또렷한 이목구비, 곧게 선 높은 콧대까지 첫인상부터 시선을 끄는 모습이었다. 차가운 분위기와는 달리 그의 존재감은 유난히 눈부셨고 도시라는 낯선 공간 속에서도 마치 이곳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소은이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하자 그는 고개를 가볍게 까딱한 뒤 조용히 뒷자리로 가 이어폰을 꽂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놀라울 만큼 찬란했던 첫인상이었다. 그 기억은 이후 그녀의 가난했던 사춘기 전체를 조용히 물들였고 쉽게 지워지지 않은 채 마음속에 남았다.
그 후에야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 남학생이 바로 그 학교에서 이미 소문이 자자한 인물에 성적도 좋고 집안도 좋으며 얼굴까지 완벽하다고 알려진 교내 최고의 인기남, 나도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곁에는 이미 그와 똑같이 눈부신 존재가 함께하고 있었다.
교내 여신이라 불리던 한유라였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선남선녀였고 누가 보아도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렇기에 이제 막 피어나려던 이소은의 마음은 속삭일 틈조차 없이 깊은 곳에 묻혔고 그렇게 긴 짝사랑으로 변해 버렸다. 그녀는 곁에서 나도윤이 한유라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성심껏 대해 주는지, 그리고 한유라가 그 마음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얼마나 제멋대로 굴고 있는지도 모두 지켜보아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수능이 끝난 뒤 한유라는 유학을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며 장거리 연애는 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차갑게 이별을 통보했다.
나도윤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간절하게 매달렸지만 한유라의 결심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날 밤 나도윤은 공항 바깥에 꼼짝없이 서서 마치 영혼을 잃은 조각상처럼 밤을 새웠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그는 이소은을 찾아왔다.
학교 옥상, 금속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쉰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소은, 나랑 사귈래?”
이소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고 그가 왜 하필 자신을 찾아왔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유라가 고등학교 내내 가장 싫어하고 경계하던 사람, 바로 그 존재가 이소은이었다.
한유라는 늘 교내 여신으로 불렸지만 고3이 되던 그해, 이소은은 두꺼운 뿔테 안경을 벗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던 앞머리를 과감하게 잘라냈다. 그렇게 감춰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분명히 달라졌다.
마치 한유라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대신하듯 그날 새로운 여신이 조용히 떠올랐다.
그날 이후 한유라는 한 학기 내내 이소은을 집요하게 괴롭혔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시비를 걸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그 뒤로, 한유라에게 복수라도 하듯 나도윤은 이소은에게 다가왔다. 가장 싫어하던 사람과 사귀는 모습을 보여 주며 한유라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소은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6년을 함께했다.
이소은은 누구보다 그를 아꼈고 한유라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윤 역시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여는 듯 보였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해 주는가 하면 아플 때는 곁을 지켜 주었으며 공연이 있는 날에는 꽃다발을 보내 주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이소은은 이제는 정말 괜찮아졌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한 달 전, 그녀는 나도윤의 옷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고이 담겨 있었고 반지 안쪽에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심장은 쿵 하고 멈췄다가 곧이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면서 놀람과 설렘, 감격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청혼을 하려는 것이라고 이소은은 의심 없이 믿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반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하지만 하루 종일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기분은 끝없이 들떠 있었다.
그날 밤 나도윤은 오랜만에 일찍 귀가한 뒤, 직접 요리까지 하며 조촐한 저녁을 준비했다.
조금은 어설펐지만 분위기는 달콤했고 와인에 살짝 취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그녀 안으로 들어와 서로 깊게 연결된 그 순간, 나도윤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무심히 화면을 힐끗 보았고 절정의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한유라였다.
이소은의 몸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고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 위에는 방금 도착한 문자 한 통이 떠 있었고 짧게 적힌 문장은 단 다섯 글자였다.
[나 돌아왔어.]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이소은의 세상은 아무 소리도 없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쥔 채, 입술을 미세하게 떨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애를 못 잊은 거야?”
나도윤은 아무 말 없이 침대 옆 탁자에 있던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붉은 불꽃이 어둠 속에서 깜빡이며 그의 무표정한 옆얼굴을 비췄다.
그 침묵은 어떤 대답보다도 잔인했다.
“도윤 씨!”
이소은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답해. 나한테 솔직히 말해봐.”
그는 짜증이 섞인 듯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만해, 이소은. 넌 나랑 사귀기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한유라였다는 거.”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소은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섰다. 나도윤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흩어져 있던 옷을 주워 입고는 조용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선 그는 주머니 속에서 반지를 꺼내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그대로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 버렸다.
쨍그랑!
찬란하게 빛나던 반지는 차가운 금속음을 내며 깊은 쓰레기통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그 순간 이소은의 심장은 정확히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저며 왔다. 그가 끝내 입에 올리지 않던 첫사랑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놓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또렷하게 드러났다.
단 한 줄의 문자만으로도 그는 지금 이 순간 그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고 고작 다섯 글자 앞에서는 청혼마저 아무렇지 않게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날 밤, 이소은은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망설임 없이 국제 순회공연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 이튿날, 나도윤은 고가의 선물을 들고 돌아와 전날 밤의 일은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였고 잠시 감정이 격해져 내뱉은 실언에 불과했다며 사과했다. 그러나 이소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미안해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다시는 6년 전처럼 자존심을 버린 채 한유라를 쫓아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고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의 곁에는 ‘현 여자친구’라는 이름표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소은은 한유라를 자극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의 대체품도, 쓰다 버릴 도구도 아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랑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